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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인연이 다다

입력
2016.04.26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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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외운 돈강법이라는 수사. “주말에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피천득 선생의 ‘인연.’ 아닌 게 아니라 끝내는 가슴이 시큰하게 저렸다. 그리고 동의했다. 맞아. 백합처럼 시드는 아사코를 만나는 세 번째는 옳지 않았어. 그 때 처음 ‘인연’이라는 단어도 새겼다. 사춘기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연애담처럼 느꼈지만 담담하고 차분했던 문체도 각별히 기억난다.

세월이 흘렀다.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다. 숱한 인간관계를 맺고 끊고 다시 이어가며 철도 나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인연이 더 자주 보인다. 이것 봐라. 인생은 결국 다 인연이구먼. 그 인연이 그 인연이 아니게 보이는 것을 어쩌랴. 맞다. 세 번째가 진짜다. 선생은 세 번째의 인연을 후회한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세 번째는 운명 같은 이끌림이 있었고 필연처럼 느껴진다.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아사코와의 세 번째가 비로소 인연이 아니었을까.

파리로 공연을 갔다 왔다. 떠나기 몇 달 전쯤 누군가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프랑스 르망에 있는 예술학교에서 무대미술을 공부하는데 한국에서 내 연극을 몇 번 봤다고, 그런데 우연히 포스터가 붙은 것을 봤고 거기에 내 이름이 있어 반가웠다고, 파리에 오면 만나 인사하고 싶다고. 그럽시다. 포트폴리오가 있으면 가져오시오. 막상 만나기로 한 날인데 까맣게 잊었다. 시차 때문에 헤매다가 나중에야 부랴부랴 친구를 만났다. 솔직히 전날 마신 와인 때문에 두통도 있었다. 만나본 즉 어리고 수수했다. 총기도 있어 보였다. 거만한 투로 대뜸 포트폴리오를 보자고 했다. 프랑스로 유학 올 때 제출했던 것들과 최근 작업이 묶인 두 권짜리 노트.

두 번째의 노트를 보는데, 이런. 이게 무슨 인연이지. 포트폴리오에는 내가 준비 중인 작품의 디자인을 의뢰 받은듯한 콘셉트의 스케치들로 도화지가 차 있었다. 늘 디자이너를 고민하던 차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웠다. 문득 그 친구에게 작품의 디자인을 맡기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판에 박힌 격려만 하고 식어가는 핫초코만 마셨다. 이런 저런 훈계와 격려로 어색한 침묵을 이겨내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이 인연이 무엇일까만 계속. 왜 하필 이 자는 내가 고민하는 공간의 스케치를 가져왔을까. 내 작품의 배경도 파리다. 사실 준비하는 작품은 큰 극장에서 상연할 것이라서 경험이 없다면 선뜻 내 맡길 수 없다. 또한 장면의 전환부터 기술적인 문제까지 고려하면 한 번도 무대디자인을 실행해 보지 않은 ‘초짜’에게 맡기는 것은 시쳇말로 도박에 가깝다. 과연 이 인연은 무엇이냐.

해 볼 텐가? 채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네. 하지만 해볼 의향이 있다면 해보게. 교묘한 제안이었지만 그 결정까지가 쉽지 않았다. 제안을 받자 친구는 사뭇 놀랐다. 하지만 말을 해놓고 놀란 것은 오히려 내 쪽이다. 시행착오를 겪고 마음고생도 하겠지만 그 때 가서 당면하여 봅시다.

만일 내 공연을 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파리에서 공연정보를 몰랐다면, 용기가 없어 연락을 하지 않았다면, 했는데도 내가 받지를 못했다면, 포트폴리오를 보지 않았다면, 봤는데도 내가 고민하던 디자인이 없었다면, 이 인연이 무엇일까를 내가 고민하지 않았다면 인연은 그 즈음에서 끊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인연이 맺어졌다. 물론 아사코와의 만남처럼 끝내 별로가 될 수도 있다. 아니다. 인연이 다다. 아니라면 그 때 가서 다시 인연을 생각해 볼 일이다. 우선은 그 친구의 결과물을 다음 달까지 기다려 보련다. 아무래도 계절의 여왕 5월은 아름다울 것이다.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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