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고사리 중에서도 곶자왈 고사리는 귀한 대접
무덤 돌담 안 고사리는 캐지 않는 게 암묵적 약속
4월의 중순에 들어서면, 제주는 분주해진다. 일년 내내 농번기 농한기가 따로 없는 제주지만, 사시사철의 변화는 뚜렷해서 일이 있으면 있는 대로 더 바빠지고, 없으면 서서히 몸을 움직여야 하는 시기가 이즈음이다. 굳이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벌판으로 숲속으로 발을 옮긴다. 한결 부드러워진 봄바람이 땅 위를 흐르듯 불기 시작하면, 흙을 제치고 기지개를 켜듯 고사리가 올라오기 때문이다.
입도 첫 해 이맘때 즈음 나의 관심사는 고사리보다는 두릅이었다. 어스름이 깔리고 빛이 점점 넓어지는 새벽 5시, 나는 장갑과 가방을 하나 메고 족은노꼬메오름 입구로 향했다. 입구 옆, 삼나무 숲길로 두릅나무가 많이 있음을 얼마 전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두 방울씩 비가 떨어지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미리 보아두었던 길로 두릅을 채취하러 들어갔다. 세상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두릅은 이미 누군가 대부분 채취해 간 상태였다. 대신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고사리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손길은 나뭇가지 위보다, 땅으로 자주 향했다. 두릅은 얼마 채취하지 못하고, 고사리만 잔뜩 꺾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숲 속을 돌아다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두릅 몇 개에 고사리가 잔뜩인 수확을 보고 호감을 보인 건 장인 장모님이셨다. 고사리를 어디서 꺾었냐는 질문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그 후로 장인 장모님은 이맘때가 되면, 만사를 제치고 제주로 내려와 고사리를 꺾으셨다.
사방이 트인 구릉 지형의 목장엔 돌담이나 덤불 주변에서 고사리를 많이 만난다. 또는 소나 말이 싼 똥 주변에서도 고사리들이 올라온다. 이런 곳에서 꺾는 고사리는 양은 많지만 색이 연두색에 가깝고 가늘며 짧다. 식감은 약간 질긴듯 하다. 넓은 벌판을 자유롭고 편하게 다니며 양껏 꺾을 수 있어서 나들이나 소풍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런 곳에는 제주 특유의 돌담에 둘러싸인 무덤이 많은데, 돌담 안에서 올라온 고사리는 꺾지 않는 게 암묵적인 약속이다. 마치 망자의 휴식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듯 말이다.
지난겨울 거센 바람에 노랗고 푸석하게 말라버린 억새밭 안에서도 고사리는 올라온다. 해를 가린 억새를 이기려는 듯, 고사리는 벌판의 것보다 좀 더 길게 목을 뺀다. 색도 조금 더 검은 듯 하며 굵다. 줄기가 굵고 긴 고사리는 조직밀도가 성기고 수분량이 많아 식감이 부드럽다. 그래서인지, 제주고사리 중에서도 곶자왈 고사리는 좀 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 곶자왈 숲 속의 어둡고 습한 공간에서 햇볕을 보려 목을 두어 뼘 길이로 길게 뺀 고사리는 굵은 줄기에 솜털이 부숭하고 검은 색이 짙다. 그런 고사리를 먹고사리 라고도 부르는데, 상대적으로 많은 양을 채취할 수 없어 더욱 귀한 식재료로 대접받는다.
이제는 고사리를 꺾겠다고 굳이 중산간의 깊은 오름까지 다니지 않는다. 이즈음의 휴일에 수망이나 영주산 부근으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고사리가 있을듯 싶으면 차를 세우고 잠깐 고사리를 꺾어오기도 하고, 가까운 유수암 지역의 고사리가 많은 언덕이나 들판에서 여유롭게 산책하듯 다니며 고사리를 꺾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제는 나나 아내나 직접 꺾기보다는 고사리 채취에 재미를 붙이신 장인 장모님 가이드를 해드리는 일이 더 많아졌다. 고사리가 많은 곳에 모셔다 드리고, 반나절이 지난 즈음에 다시 모시러 간다. 그렇게 두 분이 꺾어온 고사리는 바로 삶아서 볕과 바람이 잘 드는 마당에 흩날리지 않게 잘 말린다. 삶아진 고사리의 일부는 바로 들깨가루와 양념을 넣고 볶거나, 육개장으로 끓여 굵고 부드러운 질감 그대로 저녁상에 올리기도 한다. 낮 동안 꺾은 고사리가 오른 저녁상에서, 두 분은 여전한 재미와 보람 때문인지 말씀에 활력이 넘치신다. 그 앞에서 나는, 고사리를 꺾다 뱀에 물려 응급실을 찾은 환자들이나 길을 잃어 구조요청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묵묵히 마음 안에 눌러둔다. 그리고, 해가 지날수록 체력이 눈에 띄게 줄어 고사리 꺾는 일을 재미와 별개로 점점 버거워하시는 장인의 모습에 가슴 한 켠이 무거워지는 기분을 느낀다.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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