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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 노란 물결엔 농민들 땀방울도 배어있지요

입력
2016.04.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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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4월을 색으로 표현하라면 많은 이들이 노란색을 꼽는다. 들판에 널려 있는 노란 유채꽃 물결을 연상하며 하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요즘 제주 들판은 유채꽃의 노란색과 보리밭의 연두색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제주의 4월을 시와 노래로 표현한 작품에도 노란색을 상징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특히 수많은 작가들이 제주4·3의 아픔을 표현하면서 유채꽃을 많이 거론했다. 하지만 제주에서 유채가 재배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되는 예술의 특성상 문제될 게 없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제주4·3 당시에는 유채 밭이 거의 없었다.

제주에서 유채가 재배된 시기는 1960년대, 빨라도 1950대 중반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농림통계에서 유채가 등장한 것이 1962년 제주도 통계연보부터임을 감안하면 그 이전에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통계에 의하면 1961년 제주도의 유채재배 면적은 1,199ha에 생산량이 899톤이었다. 1966년에는 1961년에 비해 재배면적은 4.9배, 생산량은 6.2배 증가한다. 1964년에는 전국 유채생산량의 80.8%를 담당했다. 당시에는 제주 외에 전남과 전북 일부 지역에서 유채를 재배했다.

이처럼 제주에서 유채재배가 성행한 것은 기후가 유채의 생장조건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유채는 생장초기에 고온다습하고 월동기간 중에는 동해(凍害)의 위험이 없는 지역, 후반기에 저온 건조한 곳이 적합하다. 특히 다른 작물을 수확한 이후인 늦은 가을에 파종해 다음해 6월경에 수확하므로 토지 이용도를 높일 수 있다. 노동력도 적게 들뿐만 아니라, 농한기 유휴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고가의 식용유를 유채기름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식용유 및 공업용 유류 공급이 시급한 과제였던 당시 국가 상황과도 맞아 떨어졌다.

이로 인해 제주도의 유채재배는 1974년부터 1982년 무렵 최대 전성기를 맞는다. 1977년에는 1만4,512ha에서 1만8,864톤의 유채를 생산해 정점을 찍었다. 유채는 고구마와 더불어 1970년대 제주도 농촌경제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그 자리를 감귤산업이 대체하며 유채재배 면적은 급격하게 감소한다.

농산물 생산량도 결국은 경제성이 좌우한다. 1980년대 제주에서 재배열풍이 불었던 바나나와 파인애플이 1990년 들어 자취를 감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바나나와 파인애플의 경우에는 수입자유화의 영향이 컸다. 현재 제주도의 농가 조수익 중 유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채 1%도 되지 않는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보면 유채꽃 만발한 제주의 들녘은 아름다움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유채재배면적이 감소하는 게 아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농민들 입장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 생존권과 관련한 사안이다. 제주의 들판에서 노란 유채 밭을 보거든 그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민들도 한번쯤 생각해 주면 고맙겠다. 보리 등 여타 작물도 마찬가지지만.

강정효 (사)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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