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4월 26일
13년 전 오늘(2003년 4월 26일), 19세 게이 인권운동가 윤현석이 서울 동대문구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자살했다. 그는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이 나라가 싫고 이 세상이 싫다.(…) 나 같은 이들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형, 누나들의 한 번의 노력이 다음 세대의 동성애자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란 내용의 긴 유서를 남겼다.
그는 육우당(六友堂)이라는 가명으로, 설헌(雪軒), 미동(美童) 등의 여러 필명으로 온라인 인권 커뮤니티에서 활동했고, 반전 평화운동과 장애인ㆍ노동 운동에도 힘을 보탰다. 숨질 때까지 본명을 밝히지 못한 그는 “죽은 뒤에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지만, 그의 빈소에는 영정조차 놓이지 않았다고 한다. 실명이 공개된 것도 꽤 시일이 흐른 뒤였고, 생전의 그를 알지 못한 이들은 아직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윤현석은 1984년 인천 부평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 지향을 자각한 건 중3 무렵이었다고 한다. 게이란 사실이 드러난 뒤로는 학교 폭력에 시달렸고, 집에서도 연극을 배우려고 찾아 다닌 극단에서도 냉대받았다. 세상의 불의에 맞서 그가 쥘 수 있던 무기는 글이 전부였다. 그가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2002년 말 고교를 중퇴한 뒤부터였다. 월급은커녕 아르바이트로 번 돈에서 생활비를 아껴 회비를 내야 했던 상근활동가였지만, 그가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그 곳이었다.
가명 ‘육우당’의 여섯 벗은 녹차와 파운데이션 술 담배 묵주 수면제였다. 교회는 그를 차별했지만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유서에 그는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다면(…) 죽는 게 아깝지 않다”고도 썼다.
살아서 시인도 되고 성악가도 되고 배우도 되고 싶던 그는, 그래서 제 목숨을 던졌을 것이다. 냉담한 세상의 비루한 편견이 조금은 깨어지기를, 인권운동이 보다 힘차지기를, 자신처럼 덜 산 성소수자들도 기 펴고 살 수 있기를, 차별 없는 세상이 앞당겨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를 알던 많은 이들은, 살아서 해낼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았을 청년이었다고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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