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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오늘의 거짓말

입력
2016.04.2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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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다 남은 사과 속이나 불량한 분홍빛 튜브 같은 것을 주워 먹을 때부터, 길에서 만난 걸인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때부터, 나는 천사를 만날 운명임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내 앞에 천사가 나타나리라. 천사는 하얗고 긴 옷을 입고 있거나 무지갯빛 후광 같은 걸 쓰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타조에게나 어울릴 날지도 못 할 날개도 버렸을 것이다. 천사는 어린애들이 보는 그림책 속에 나오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세상이 쓰레기와 곰팡이로 뒤덮여 있다는 것조차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땅으로 내려온 천사는 그늘이 지지 않는 가벼운 말투와 떨어진 날개의 후유증인 끝없는 산만함을 지니고 있으리라. 이따금 천사를 알아보고 달려오는 고양이와 강아지들을 귀찮아하면서 자꾸 달아나고 자꾸 벗어나고 있으리라.

드디어 오늘 나는 어두운 골목 어귀에서 천사와 마주쳤다. 안녕, 천사. 나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오래 전부터 천사를 만나면 하려고 벼르던 말이 튀어나왔다. 나의 고백을 듣자 천사가 중얼거렸다. 뭐야, 또 고양이가 따라오고 있잖아. 나는 고양이가 아니라 도서관에 살고 있는 생쥐에요. 라식의 후유증 때문에 네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아. 천사가 중얼거렸다. 수술을 받고 난 다음에는 아주 멀리 있거나 높이 있는 것만 보이거든. 나는 뜨끔했다. 어쩌면 천사는 생쥐 주제에 고양이처럼 구는 나의 허영을 본 게 아닐까? 나도 이제는 천사라기보다는 천사의 후유증에 가까워. 천사가 중얼거렸다. 천사는 끝없이 선량해져야 하고, 끝없이 아름다워져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나처럼 희박해지고 사소해져서 후유증만 남게 되거든. 나는 ‘후유증’이라는 말을 기억해 두었다. 도서관에 돌아가면 사전 속에서 그 단어를 찾아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에는 '연루'를 마셨고, 점심끼니는 간단히 '또'로 때웠다. 넌 도서관에서 뭘 하는데? 천사가 물었다. 낱말을 잔뜩 먹은 뒤 거짓말을 만들어요. 새로 만든 거짓말로 다른 거짓말을 지워나가는 거죠. 천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머리가 더 아파. 어깨도 아프고. 아직도 날개가 달려있는 것 같아. 집에 가서 타이레놀 먹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야겠어. 천사는 후광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북북 긁어대면서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도서관은 거짓말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로다. 수백 개의 서가들, 그 속에 꽂혀 있는 수백 수천만 권의 책들, 책마다 넘쳐나는 깨알 같은 거짓말들. 사람들은 거짓말을 사랑한다. 거짓말은 지나치게 달콤하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아름답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말끔하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어렵고 거짓말은 지나침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뻔뻔해서, 모든 두꺼움이 그렇듯, 어리석음과 추함과 두려움을 가려주기 때문이다. 나, 생쥐도 거짓말을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거짓말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모든 거짓말이 의심과 회의로 향해 갈 운명이기 때문이다. 생쥐에게는 의심과 회의가, 이를테면 사람들이 삶의 의미라고 말하는 무엇이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거짓말은 다른 거짓말을 낳고,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날마다 새로운 길을 만들어 미로를 복잡하게 만든다. 생쥐가 사랑하는 거짓말은 마침내 자신의 운명에 도달할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은 다른 거짓말을 지우고, 또 다른 거짓말을 지우고, 또 다른 거짓말을 지운다. 날마다 길 하나를 소거하면서 미로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어쩌면 미로에는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믿음이 되면 미로의 목적은 생쥐의 목적이 될 것이다. 생쥐는 아직 목적을 갖지 못해 생쥐인 것. 도서관에 돌아온 나는 ‘후유증’ 이라는 단어를 삼켜 오늘의 거짓말을 완성했다. “오늘 골목 어귀에서 천사의 후유증과 연루된 고양이를 보았다, 또.”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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