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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중에 동화같은 마을, 멕시코 바토필라스

입력
2016.04.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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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마을에 꼼짝 없이 발이 묶인 사연

바토필라스 주민의 최대 관심사는 실내·외 장식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깊은 산 속의 동화다.
바토필라스 주민의 최대 관심사는 실내·외 장식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깊은 산 속의 동화다.

어느 햇볕 좋은 일요일, 멕시코 크릴에서 홀로 '현금인출'이라는 성스러운 행위를 하고 있었다. 부스에 들어오는 낯선 사람을 의식해 등을 돌려 한 장 한 장 지폐를 셌다. 정확했다. 룰루랄라 발에 날개 단 듯 숙소로 돌아오는데, 불편한 현실이 머리를 강타했다.

'어......카드는 어디로 갔지?'

바토필라스 여행은 마지막 인출일 수 있다는 불길함과 함께 시작됐다. 산으로 둘러싸인 섬, 바토필라스로.

위대한 생존 능력이여. 바랑카스 델 코브레 안에도 타라우마라족 집 굴뚝엔 연기가 피어 오른다.
위대한 생존 능력이여. 바랑카스 델 코브레 안에도 타라우마라족 집 굴뚝엔 연기가 피어 오른다.

바토필라스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바랑카스 델 코브레’와 ‘크릴’에 대한 갈무리가 필요하다. 바랑카스 델 코브레는 멕시코 북서부에 있는 20여 개의 패밀리 협곡을 이른다. 잘 알려진 아리조나의 그랜드 캐니언에 비해 4배 더 크고 넓다. 세상의 가장 깊은 협곡을 숨긴 이 험난한 산중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이중 ‘크릴’은 위대한 생존 본능에 여행자 유치 능력까지 품은 마을이다. 숙소, 식당, ATM기, 기차나 버스 같은 교통 수단 등이 여행자의 편의를 한껏 봐준다. 바랑카스 델 코브레의 정기 아래 보고 하고 즐길 거리가 펼쳐져 있다. 보너스는 40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타라우마라(혹은 라라무리)족과 같은 아스팔트 길을 걷는 타임슬립 경험이랄까.

바토필라스는 크릴로부터 남쪽 방향, 바랑카스 델 코브레의 가장 아랫도리에 있다. 왕년에 세계 최대 은 광산지인 노르웨이 콩스버그보다 7배 많은 은을 배출한 이곳은 오지로 여길 법한 크릴보다 더 외딴 곳이다. 멀고, 깊고, 되지도 않는 모험심을 자극한다. 누구는 이곳을 진짜 멕시코라 했고, 누구는 크릴에서 바토필라스로 가는 ‘빌어먹을' 도로가 바뀌지 않게 해달라고 수상하게 기도했다. 수수께끼였다. 협곡으로 둘러싸인, 섬 같은 변방의 고독함이 자리잡은 그곳. 다만 내겐 여행의 생명 줄과 다름없는 카드가 사라져 기대의 일부를 이미 크게 상실한 상태였다.

밴 타입의 버스 손님은 창문을 열 권리가 없다. 이것이 얼마나 천운인지는 먼지 바람을 일으키는 도로를 달리면 안다.
밴 타입의 버스 손님은 창문을 열 권리가 없다. 이것이 얼마나 천운인지는 먼지 바람을 일으키는 도로를 달리면 안다.
작품명 ‘첩첩산중의 공사’. 그 사이 승객은 바위틈에서 화장실 용무를 빛의 속도로 해결한다.
작품명 ‘첩첩산중의 공사’. 그 사이 승객은 바위틈에서 화장실 용무를 빛의 속도로 해결한다.

다음날 바토필라스행 버스 안에서 내내 '내 카드 내놔' 귀신이 따라다녔다. 사실 걱정해봤자 해결될 건 없었다. ATM기는 내일 열릴 거라 했고, 도난 카드로 분류해 멕시코시티 본점으로 옮겨 파기될 예정이었다. 아는 멕시코 자매의 선처로 잠시 내 카드를 보관할 거라 했지만 그때 가봐야 아는 일이었다. 이 귀신이 물러난 건 그 '빌어먹을' 도로에서였다. 버스는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허기진 하이에나! 목표물인 사슴을 향해 곤두박질하듯 산등성이를 돌고 꺾고 밀리거나 아예 길을 만들어 달렸다. 루프에 헤드뱅잉을 하거나 공사 중인 도로에 어이없이 멈추기도 다반사. 한편, 버스 내 승객들이 슬슬 외투를 벗기 시작했다. 2,438m의 크릴로부터 579m의 바토필라스로 하강한다는 증거다. 5시간 만에 시야에 들어온 바토필라스 표식, 달려온 거리는 고작 140km. 크릴이 현실이라면 바토필라스는 백일몽 같았다.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마을이라는 듯 하루 단 한 대의 성난 버스가 두 마을을 연결한다.

협곡의 방점을 찍는 사테보 성당. 마른 침을 넘기며 강과 산, 비포장 도로를 거친 자만이 닿을 수 있는 목적지다.
협곡의 방점을 찍는 사테보 성당. 마른 침을 넘기며 강과 산, 비포장 도로를 거친 자만이 닿을 수 있는 목적지다.
멕시코를 여행해도 대표 상징인 선인장을 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이 길은 다양한 종류와 크기의 선인장을 학습하는 현장이다.
멕시코를 여행해도 대표 상징인 선인장을 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이 길은 다양한 종류와 크기의 선인장을 학습하는 현장이다.
바토필라스에서 8km 지점의 사테보 마을에 1세기 넘게 버티고 있는 일명 ‘잃어버린 성당(lost cathedral)’.
바토필라스에서 8km 지점의 사테보 마을에 1세기 넘게 버티고 있는 일명 ‘잃어버린 성당(lost cathedral)’.
시골로 갈수록 종교는 좀더 삶 가까이 있다. 이날 마을 여인들은 친목 도모에 가까운 모임 중이었다.
시골로 갈수록 종교는 좀더 삶 가까이 있다. 이날 마을 여인들은 친목 도모에 가까운 모임 중이었다.

"거기 가려면 (양팔 크게 벌려)이따 만한 물통 들고 가."

하룻밤만 지낼 계획이라 숙제부터 하자 싶었다. 1870년에 세상에 등장한 사테보 성당(Mision de Satevo)을 보는 일이다. 고작 8km의 트래킹이니, 산소 부족의 버스 감옥을 벗어난 기념으로 호기 있게 나섰다. 문제는 산이 한 톨의 그림자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비포장 길의 좌청룡은 강을 따라 유려하게 펼쳐진 산과 나무요, 우백호는 쩍쩍 갈라진 절벽이다. 모두 직립 구조였다. 뜨거운 날숨이 계속되고 아련했다. 비탈진 산기슭에 몸을 세운 타라우마라족의 집도, 도미노처럼 겹쳐진 거친 산 결도, 리듬의 완급을 이루던 강줄기도. 사막이라 생각한 그 길 끝에 오아시스처럼 사테보 성당이 서 있었다. 타라우마라족에게 선교 활동을 펼친 예수회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탐구심보단 바토필라스 트래킹의 반쪽 승전보를 울리는 성취감이 더 컸다. 크릴로 돌아가는 버스가 ‘4:00’에 있다는 쪽지를 쥔 채 돌아섰다. 비닐하우스의 온실 같은 길로 유턴! 서둘러!

중앙광장 근처, 왼편의 패셔니스타 타라우마라족이 앉은 그 계단 끝이 명패 없는 버스 정류장이다.
중앙광장 근처, 왼편의 패셔니스타 타라우마라족이 앉은 그 계단 끝이 명패 없는 버스 정류장이다.
마을의 심장부가 되는 광장. 동네 구경에 나서면 누구나 한번쯤 거쳐야 할 통과의례 지점이다.
마을의 심장부가 되는 광장. 동네 구경에 나서면 누구나 한번쯤 거쳐야 할 통과의례 지점이다.

▦어쩔 수 없을 땐 즐겨라…포기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여행은 언제나 역습이다. 집 앞에 앉아 여행객을 보며 시간을 소비하는 주민들의 눈빛에 의문이 서려 있다. 혹시나 해서 쪽지를 폈다. ‘4:00’, 같은 숫자의 다른 해석. 우린 오후라 이해하고 그들은 새벽이라 썼던 그 숫자. 새벽 4시에 있다는 버스를 오후 4시에 기다린 꼴이었다. 내일은 갈 수 있겠지? 다음날 버스 정보를 수소문하니 모두 우릴 이곳에 감금하려는 범죄자들뿐이었다. 경찰은 다음날 새벽 4시라 했고, 마을 토박이는 그 다음날 새벽 4시라 했다. 실패란 확률에 인생을 걸어본 적이 없건만 다음날 버스는 새벽 6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차 냉동칸에라도 타겠다는 시도도 실패, 히치하이킹을 하려는 시도도 실패. 일단 전화가 필요했다. 짐을 잠시 맡아주기로 한 크릴의 숙소와 카드를 맡아놓겠다고 말을 흐리던 은행이 수신인이었다. 이곳 전화는 ‘Telefonia’라 쓰인 상점에서 도도한 언니에게 전화번호를 준 뒤 통화음이 울리면 발신인이 전화 부스에 들어가 통화하는 구식 방식이다. 탁한 연결음과 함께 드라마 ‘시그널’의 무전기 같은 괴상한 시간 연결 기제로 빨려 들어갔다. 우리는 과거에 있었고, 현재의 그들은 모두 부재중이었다.

은행도 ATM기도 없는 이 마을의 자랑인 주유소. 이에 비하면 크릴조차 군더더기 많은 속세 같다.
은행도 ATM기도 없는 이 마을의 자랑인 주유소. 이에 비하면 크릴조차 군더더기 많은 속세 같다.
바토필라스를 은 광산 도시로 만드는데 공을 세운 알렉산더 셰퍼드의 잔재, 아시엔다 데 셰퍼드(Hacienda de Sheppard).
바토필라스를 은 광산 도시로 만드는데 공을 세운 알렉산더 셰퍼드의 잔재, 아시엔다 데 셰퍼드(Hacienda de Sheppard).
성경에서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무화과 나무. 암벽도 뚫고 퍼져나가는 기세가 두려울 정도.
성경에서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무화과 나무. 암벽도 뚫고 퍼져나가는 기세가 두려울 정도.
이 마을엔 개만큼 소가 많다. 스스로 백마로 착각하는 우아한 몸짓의 소도 있다
이 마을엔 개만큼 소가 많다. 스스로 백마로 착각하는 우아한 몸짓의 소도 있다
마을의 대소동이라면 초등학생의 운동회가 열리는 것 정도.
마을의 대소동이라면 초등학생의 운동회가 열리는 것 정도.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승자다. 울분과 알 수 없는 복수심으로 활활 타오르던 감금의 악몽은 어느새 초등학교 운동회의 승패에 몸이 달아오르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주민마다 3일 후의 버스는 확신했다. 포기하니 새뜻한 것이 들어왔다. 이곳에 입성하면서부터 알았지만 인식하지 못한 일상의 발견이었다. 풍성한 오렌지 나무를 비롯해 부겐빌레아 넝쿨 식물과 꽃나무로 카페트가 깔린 길에 간판 없는 구식 상점과 주택이 세상의 모든 색을 입고 서 있다. 100년 넘은 나무테이블 위에서 물품을 계산할 땐 현실인지 가상인지 대략 판단 불가였다. 숙소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단락도 강약도 없다. 반대편과 내가 선 마을을 갈라놓은 강에선 타라우마라족이 더디게 빨래를 하고, 강 사이는 바람의 흔들 다리가 중매했다. 5일 내내 단벌 신사였음에도 새록새록 달라 보이는 일상. 욕망이나 욕구 따윈 거세된 현실 세계의 막다른 골목이 바로 멕시코의 바토필라스였다.

사흘 째 되던 밤 나는 ‘쭈쭈바’를, 탕탕은 막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었다. 낮에 게을렀던 마을도 밤이 되면 활력을 띄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별을 보러 나온 마을주민과 마지막 눈인사도 주고 받았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날 것이다. 본의 아니게 5일이나 체류한 ‘어쩔 수 없는’ 상황, 떠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어쩔 수 없는’ 여행자란 신분. ‘어쩔 수 없는 것’에 발버둥치는 일 따윈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어 보내리.

p.s 크릴로 돌아와 은행으로 가장 먼저 튀어갔다. 이 카드의 종적 보고는 감사의 달 5월인 다음주로 미룬다.

▦여행의 선물

강미승 여행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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