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엔딩, 선거 난리도 끝났으니
이제부터 봄은 이곳 사람들의 몫
어쩌다 맡게된 귀농캠프 강의
참석자들의 눈이 맑아 보인다
직장생활하며 다다른 농부의 꿈
그때 내 표정도 맑았으리라
벚꽃이 섹시하다는 건 인정한다. 나무 전체가 꽃 덩어리로 바뀌며 여심을 홀리고 엉덩이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걸 보면 그만큼 요염을 품고 있음이 분명하다. 꿀벌뿐 아니라 전 국민을 상대로 색기를 뿜어 천리 남쪽 농로까지 승용차를 줄 세우는 능력은 사람이 페로몬으로 저수지를 만들어도 못 따라 갈 거다. 그렇게 화려한 척하던 꽃잎이 떨어지니 향수 냄새 풍기던 발길도 뜸해졌다. 벚꽃 엔딩이 곧 봄 엔딩인지 동네가 사뭇 조용하다.
봄 난리에 일조하던 선거도 끝났다. 선거운동은 어느 당이 더 시끄럽게 노래를 틀고 돌아다니나 하는 과정이었고, 결국 한 정당이 설날도 아닌데 큰절하고 세뱃돈 요구하다가 망했다는 게 선거의 결과였다. 바뀐 것은 없고 기대할 것도 없다. 이긴 자도 진 자도 정신 못 차렸다. 미워서 안 찍은 건 맞지만 예뻐서 찍은 건 절대 아닌데 말이다. “민의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말이 봄 노래만큼이나 많이 나온다. 그 말이 건방지다. 스스로를 겸허하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수틀리면 민의를 거스를 수도 있다는 말로 들린다. 평소에는 모르는 게 당연하고, 큰 돈 치러서 선거를 해야 국민의 뜻을 안다는 말인가? 하는 짓들 보면 아직 ‘ㅁ’자도 모르는 게 분명하구먼.
어쨌든 지금부터의 봄은 온전히 이곳에 사는 사람의 몫이다. 촌 동네의 봄은 플래카드에서 온다. ‘면민체육대회’ ‘군민노래자랑’ ‘00초등학교총동문회’ 등을 알리는 현수막이 로터리와 삼거리에서 봄바람 덕에 펄럭이며 효과음까지 낸다. 올해도 그랬다. 면민체육대회 전날부터 남정네들은 행사장에 미리 천막을 쳐서 자리를 잡고 어머니들은 고기를 삶았다. 당일 아침, 분명 체육대회라고 했는데 어머니들의 꾸밈새는 예식장 가는 차림이다. “원샌이 우리 델꼬 갈라고 오셨는갑네~” 용강댁이 큰 소리로 반가워하셨다. 아침 햇살 받으며 계단에 앉아계시던 어머니들 얼굴이 진달래 색이다. “우리는 트럭에 타고 있을텡게 할아버지 방에 테레비 좀 고쳐주고 오실라요?” 날몰댁이 행동지침을 하달했다. 언뜻 한 차에 다 타시기는 많다 싶었지만 우선 회관으로 들어가 TV를 고쳤다. 기술은 필요 없다. 뺐다 끼고 껐다 켜면 된다. “어디서 그런 고급 기술을 배웠댜?” 옛 이장님의 말씀을 뒤로 하고 급하게 나오니 어머니들이 모두 차에 비집고 앉아 계셨다. 차 문을 열며 세어보니 여덟 분이 트럭 앞뒤로 가득했다. 놀라웠다. 그것도 운전석은 비워두고 말이다.
“용케 다 타셨네요. 차가 후져서 시끄러워도 이해하세요” 1톤 트럭에 사람만 1톤 가까이 싣고 출발했다. “사람이고 차고 간에 시끄러워야 좋아요.” 간전댁할머니가 위로하셨다. 그 말씀은 도화선이었다. “하아! 집도 조용하믄 싸운집 맹키로 안 좋아” 저매댁도 거들었다. “하아! 개도 그랴. 병든 놈 맹키로 짖도 않고 가만히 있으믄 못 써.”서너 분이 또 “하아”를 연발했다. ‘하아’라는 표현은 긍정에도 쓰이고 부정에도 쓰인다. 높은 ‘솔’에서 ‘미’ 정도로 내려오며 발음하는데 그 음과 길이의 미묘한 차이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사실 아직도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냥 행간을 읽는 수 밖에 없다.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들 말씀이 엔진 소음을 이겼다.
어머니들은 차림새만큼 고기도 곱게 썰었다. 댓바람부터 들이켜기 시작한 술과 고기가 사람들의 몸 속에 봄기운을 불어넣었다. 줄다리기도 생략한 체육대회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노래자랑이다. 각 마을 내로라는 대표가 참가해 실력을 겨루는 명목이지만 무대 앞은 대형 관광버스로 변한다. 어머니들은 춤을 출 때 발 앞꿈치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뒤꿈치를 번갈아 땅에서 떼며 그에 따른 관절의 움직임도 미미하다. 춤의 느낌은 표정과 팔의 움직임으로 충분하다. 열량 소모를 최소화하면서 장시간 즐길 수 있는 우리만의 춤이다. 2,3분 추고 나면 헐떡거리며 앉아있어야 하는 탱고나 비보잉에 댈 게 아니다. 특이한 점은 춤을 추는 동안 부부간에는 마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춤의 룰인가 보다. 어쨌든 봄날의 운동장과 도로 위에서 만인이 즐기던 이 몸짓은 먼 훗날 다큐멘터리에서 ‘대한민국시대’의 전통춤으로 언급될 것이 분명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들은 다시 고추 모종과 고구마순 얘기로 시끄러웠고 표정은 한껏 봄스러웠다.
그리고 며칠 후, 어쩌다 강의를 하게 됐다. 지인이 구례에서 마련한 귀농 귀촌 캠프가 있는데 와서 얘기 좀 해달라고 해서 그렇게 됐다. 맞다. 강의보다는 그냥 얘기였다. ‘이제 5년밖에 안 된 놈이 뭘 안다고 사람들 앞에서 떠들겠다고 했나’ 싶어 후회스러웠지만 포스터에 얼굴까지 찍혔으니 해야만 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면도하고 머리도 깎고, 서울 갈 때만 입는 남방도 차려 입었다. 20명 남짓의 참가자 대부분은 나보다 연령이 높아 보였다. 퇴직을 앞두고 여유로운 귀촌을 꿈꾸는 분들인 듯 했다.
얘기를 하자니 나를 먼저 소개하고 나이도 말하게 됐다. “보기 보다 어립니다. 양띠구요. 예전에 저를 55년 양띠로 보는 분들도 있었지만 67년생입니다.” 갑자기 수군거렸다. “어머” 하는 탄식성 감탄사도 들렸다. 나도 눈치가 있다. ‘55년이 아니라구?’ 하는 눈빛이었다. 신경 쓰지 않았다. 마주한 참석자들의 눈이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아가면서 힘든 점을 얘기했지만 그들은 기운 빠져 보이지 않았다. 질문에도 생기가 있었고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순서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한 분이 이런 저런 질문을 더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원선생님은 꿈을 이루신 분이니 부럽네요.” 그 다음 대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꿈을 이룬 사람이라……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꿈이 있었다. 목수가 되고 싶었다. 도편수는 못돼도 집을 짓는 대목이 돼서 사람들에게 건강한 집을 지어주고 싶었다. 야근을 바꿔가며 열심히 한옥학교를 다녔고, 머릿속에는 이미 소박한 집 한 채가 들어서 있었다. 삶이 역사인 분들에게 전통과 삶이 연결되는 과정을 배웠다. 그것만 가지고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생태건축학교를 찾았다. 그곳에서 환경과 에너지에 대한 고민을 나눴고 꿈의 허기를 조금씩 채워갔다. 대학원 진학도 생각하고 유학도 꿈꿨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한 것은 조용한 삶이었다. 환경운동가 호지 여사의 ‘오래된 미래’를 다시 읽었고, 니어링 부부의 책들을 접했다. 그리고 나의 꿈은 생산, 노동, 보존, 순환으로 이어져 농사로 이르게 됐다. 차에서 쪽 잠을 마다 않으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피곤한 줄도 몰랐고, 끝내 인연을 만나고 이내 이렇게 됐다.
캠프 참가자들의 표정이 맑았던 이유를 알았다. 나도 꿈을 이어가는 동안 그들과 같은 표정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신경과 시선이 어딘가를 향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정녕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살아있고 움직이는 이유가 명확하면 숨 쉬는 것도 의미가 있는 행위가 된다.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그에 따른 수난과 고통이 옵션이 아닌 사회에 살지만, 내가 그리는 모습이 있고 언젠가 가능하리라는 기대는 천국이나 이상향을 좇는 독실한 종교인만큼이나 큰 힘을 갖게 한다.
그러면 나는, 꿈을 이룬 건가? 농지원부에, 경영체등록에, 누가 봐도 농사꾼인 겉모습까지 갖췄다. 누구는 귀농 성공사례라고 말하고, 이제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려 들기까지 하고 있다. 농부가 꿈이었고 농부가 됐으니 다 된 건가? 허어, 꿈에 이르니 꿈이 사라졌다. 이제 내 꿈은 뭘까.
양파밭에 퍼질러 앉았다. 지난달 감자 심을 때 한 번 매줬던 두둑에 다시 잡초들이 들어앉았다. 이젠 화도 안 난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뽑는다. 비 온 뒤라 호미질 안 해도 잘 뽑혀 좋다. 잡초 뿌리마다 딸려 나온 지렁이들이 햇볕이 무서운 빠삐용처럼 꿈틀거리다가 다시 흙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놀랐겠지만 운이 좋은 놈이다. 내 엉덩이 밑에 깔렸을 동료 지렁이들에 비하면 명이 길다고 하겠다. 옆에는 엊그제 만들어 놓은 고구마 두둑이 오븐에서 갓 나온 바게트처럼 엎드려 있다. 몇 년 전에 고랑이 삐뚤빼뚤 하다며 아내가 그랬다. “밭 두둑을 예쁘게 만들어야 예쁜 색시 얻는다구 그러시던데.”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두둑 모양은 다 아내 책임이다. 이번에 만든 두둑들은 비교적 미끈하게 잘 빠졌다. 아내도 요즘 예뻐진 것 같다. 다 내 덕이다.
낯선 승용차가 농장으로 들어왔다. 웬 여자분이 차에서 내려 다가오더니 “귀농하셨죠? 내려오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세상에, 나를 도시 출신으로 알아보는 사람도 있다니. 자기도 구례에 내려오려고 땅을 살펴보는 중이라고 했다. 몇 마디 나누다가 웃으며 물어봤다. “제가 귀농한 줄 어떻게 알아보셨나요?” “아, 알아본 게 아니구요, 윗마을 어르신이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귀농한 사람 있다고, 뚱뚱한 편이라고 하시길래 금방 알아봤어요. 네”
혜안을 가진 듯 보였던 여자분이 나가고 장씨아저씨가 들어오셨다. 내 인상착의를 설명한 분이 분명하다. 아저씨는 챙이 일자로 펴진, 요즘 아이들 패션의 모자를 쓰고 계셨다. “못 보던 모자네요. 젊어 보이시는데요.” 아저씨는 자랑거리가 있을 때 아랫입술을 먼저 내민다. “이거 코오롱 모자여. 아주 개벼워” 벗어서 보여주시는데 내가 알던 상표는 아니었다. 소나무 두 그루는 맞는데 나뭇가지 수가 좀 모자랐다. “잘 어울리시네요.”
물 한 사발 원샷하신 아저씨가 물었다. “머 심을라고 두둑을 이쁘게 해놨당가” “올해 고구마 좀 잘 해 볼라구요. 작년에 양이 모자라서 올해는 조금 더 심으려구 많이 해 놨어요.” “허어, 농사꾼 다 됐구마. 벌써 고구마 두둑을 다 해놓구. 작년 꺼정은 심을 때 다 돼서야 급하게 하드만. 이제 수확도 좀 나아지겄는디?” “모르겠어요. 나아질라나 매번 똑같을라나.” 아저씨는 정색을 하셨다. “이봐 유헌이, 농사꾼이 무슨 맛으로 살겄는가. 작년보덤 올 농사가 낫겄지, 수확도 늘고 가격도 좋겄지 생각하며 사는겨. 우리가 누구 사기쳐 먹구 사는가. 심구 캐서 먹구 살면서 작년보다 낫길 바라는 것도 욕심이라 할텐가.”
아저씨는 농막을 나서다가 철쭉을 보고 소리지르셨다. “꽃 좋~네!” 나는 꽃보다 아저씨가 좋다. 내겐 아저씨가 봄이고 동네 어머니들이 봄이다. 이 봄에 꿈을 꾼다. ‘올해 농사 잘 되고, 좋은 일이 나쁜 일보다 조금만 많았으면’ 하고. 그래 나는 봄마다 꿈을 꿀 거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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