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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페루의 비애

입력
2016.04.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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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의 빈부격차는 남미에서도 악명 높다. 인구의 10% 남짓한 백인이 정치ㆍ경제를 독점하고, 혼혈 메스티조와 인디오 원주민은 철저히 굴종하는 체제다. 부패가 극에 달했던 1990년 인플레는 7,600%에 달했다. 페루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페루가 가진 유일한 공통분모는 아무런 이해와 애정 없이 함께 살도록 저주받은 것뿐”이라고 했을 정도다. 좌익세력도 시대착오적이라고 배척한 마오쩌둥 추종 게릴라 단체 ‘센데로 루미노소(빛나는 길)’가 2000년대까지 페루에서 발호한 이유다.

▦ 일본계 이민 2세인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등장한 게 이 때다. 정치경력은 전무한 농대 교수였던 그는 90년 대선에서 “페루인이여, 일어서라”며 빈곤층을 자극해 일약 대권을 거머쥐었다. 페루 국민은 그에게 동양인(중국인)을 비하하는 표현인 ‘엘 치니토’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함께 억압받는 동지로 환호했다. 이에 화답하듯 그는 집권 다음해 인플레를 140%로 떨어뜨리고 4년 만에 성장률을 마이너스 4%에서 13% 끌어올리는 기적을 연출했다. 후지모리에 대한 인기는 동양인으로 얼굴을 바꾸는 성형수술 열풍으로 이어졌다.

▦ 화려한 등장과 달리 그의 퇴장은 비참하고 비루했다. 2000년 오른팔이던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국가정보국장이 야당 의원을 돈으로 매수하는 비디오가 공개되면서 몰락이 시작됐다. 아시아ㆍ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참석차 브루나이에 있던 그는 일본으로 도주한 뒤 페루 의회에 팩스로 대통령 사직서를 보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신병인도를 요구하는 페루 당국에 일본 정부는 일본 국적자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경악한 페루 국민은 후지모리와 발음이 비슷한 ‘도망자’라는 뜻의 ‘후지티보’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2005년 칠레에서 체포돼 압송된 그는 납치살인 등 인권탄압과 부정부패 혐의로 25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 지난 10일 치러진 대선에서 후지모리의 장녀 게이코가 1위를 차지해 6월 결선투표에서 대통령 등극이 예상된다. 그의 아들 겐지도 재선에 성공해 차기 국회의장 물망에 오르고 있다. 대통령과 입법부 수장을 후지모리의 자식들이 독식할 수 있는 상황에 ‘후지모리 향수’가 거론된다. 좌파 정부의 실정으로 다시 빈부격차가 커지고 경제가 거꾸러지는 현실 때문이다. 독재와 경제 사이에서 허덕이는 페루 국민의 비애가 느껴진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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