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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누가 김밥 맛을 망쳐놓았나

입력
2016.04.2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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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게 김밥 아파트구나.” 오른쪽으로 보이는 공사현장을 가리키며 동행하던 친구가 웃었다. 아파트 구조가 타워 형인가 짐작했지만, 참 멋대가리 없는 별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심드렁한 내 표정을 보며 친구는 말했다. “우습게 보지 마. 김밥 아파트라는 네이밍에 자못 감동적인 스토리가 깃들어 있으니까.”

얼마 전 친구가 부동산 카페를 기웃거리다 우연히 읽었다는 김밥 아파트의 사연인즉 이랬다. 그러니까 부동산 경기가 최고조에 이르던 2000년대 초반, 빚을 내서라도 내 집을 장만하는 것이 수순처럼 여겨지던 그 무렵에 교통입지 괜찮은 이 동네로 30대 초중반 직장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재개발이 논의되었다. 평당 400만~500만원하던 지분이 4,000만원까지 치솟았다니, 오래된 집 팔고 떠난 사람들에게는 노다지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재개발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경제위기가 터졌다. 헬륨가스 가득 채운 앨드벌룬 같았던 부동산 경기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고, 사업성이 낮아진 전국의 아파트 건설현장은 좌초하기 시작했다. 그 동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시공사도 시행사도 뒷짐을 지고 수수방관하는 사이 사업비와 금융비만 속절없이 불어나는 형국이었다. 그때 아파트 장만은커녕 자칫 거액의 빚더미만 안고 길거리로 나앉게 된 젊은이들이 나섰다.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린 그들이 기존의 조합을 해체한 뒤 새로운 조합을 출범시켰다.

바닥으로 추락해 생존의 갈림길 앞에 서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하리라. 새로 들어선 집행부는 비장하게 시작했다. 사무실 냉난방기를 가동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커피와 음료, 물까지 각자 집에서 조달했다. 법으로 보장된 조합 이사 및 대의원의 월급과 수당도 마다하며 돈 샐 틈을 꽁꽁 틀어막았다. 회의가 있는 날이면 그들은 당연하게 자기 돈과 시간을 쪼개 사무실에 모였다. 그리고 2,000원짜리 김밥을 먹으며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았다. 여러 해에 걸쳐 시공사와 양보 없는 릴레이 협상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설계변경안을 놓고 피 말리는 샅바싸움을 하는 테이블에도 그들은 집에서 가져온 믹스커피와 2,000원짜리 김밥을 올렸다. 그 흔한 회식이나 술자리 한 번 없이 꾸역꾸역 식은 김밥을 먹어가며 초심을 다져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6년여가 흘러 시공사가 많은 부분을 양보하면서 극적인 회생을 이끌어냈고 이런 사연이 알음알음 전해져 ‘김밥 아파트’라는 애칭이 붙었다는, 꽤나 근사한 이야기였다.

무심히 지나쳤던 공사현장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푸릇푸릇한 인생의 한 시기를 분투하며 보내는 과정에서 생존체력 막강한 40대로 변모했을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궁금하고 부러운 한편 김밥 생각이 간절해졌다. 저녁으로 먹을 김밥을 사들고 집으로 갔다. 아침에 먹고 남은 된장국을 데워 식탁에 앉은 후 TV를 켰다. 뉴스 시간이었다. 일본 지진 이재민에게 이웃마을 아이들이 손수 만든 주먹밥을 전하는 장면이 나왔다. 저 아이들에게는 이번 일이 긴긴 인생의 고비에서 스스로를 지탱해주는 나침반 같은 경험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낮에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와 TV 속 고사리 손길이 오버랩되면서 김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된장국 몇 숟가락을 떠먹으며 먹먹한 속을 다스리는 사이 화면이 바뀌었다. 총선 이후 정치판에서도 비대위가 꾸려지고 있었다. 공과를 다투며 계산기 두드리느라 분주한 그들의 비릿한 눈빛과 김밥 옆구리 터지는 행태를 지켜보고 있자니 말 그대로 욕지기가 났다. 당신들 아직 정신 못 차렸군요. 혼자 중얼거리다 바닥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진실과 마주하기 쉽지 않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머리칼이 쭈뼛 섰다. 아까운 김밥 두 알을 마저 먹지 못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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