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원자폭탄 투하지인 일본 히로시마(廣島) 방문 의지를 사실상 굳힌 것으로 보인다. 21일 요미우리(讀賣)신문에 따르면 내달 이세시마(伊勢志摩) 주요7개국(G7) 정상회의 때 히로시마평화공원을 방문하는 계획과 관련해 미일 정부가 사실상 이 같은 방침을 굳혔다. 히로시마행이 성사되면 미국 현직대통령의 첫 피폭지 방문이 된다.
그 동안 미국 정부는 존 케리 국무장관이 지난 11일 현역 장관으로선 처음으로 히로시마위령탑에 헌화한 후 미국 내 여론을 주시해왔다. 퇴역 군인들 사이에서 원폭투하 정당성을 의심하는데 대한 반발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려하던 미국 내 ‘사죄’논쟁은 번지지 않았고,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같은 유력 신문이 오바마의 방문을 요구하는 사설을 내는 등 도리어 우호적 환경이 조성됐다.
취임 이후 줄곧 비핵화를 주장해온 오바마 대통령이 핵무기 피폭의 상징인 히로시마를 찾는다면 ‘핵무기 없는 세상’에 대한 그의 역설은 더욱 빛을 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그의 행보가 제국주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지켜낸 수많은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희석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진보 이성들은 세계 최대 핵무기 보유국인 미국이 핵무기 없는 세상을 주장한다는 게 과연 온당한가라는 질문도 던지고 있다.
더구나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극대화하고 전범국가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고대했다는 점에 이르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은 아베 정권의 역사수정주의에 면죄부를 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자민당은 이미 태평양전쟁 A급전범을 단죄한 도쿄재판에 대해 과거사 검증을 시작했으며 평화헌법 개정 추진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거듭나고 있다. 때문에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행은 전쟁 피해국 이미지를 극대화시켜 보통국가로 거듭나려는 아베 정권의 외교이벤트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베 정권의 이중 행보는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한다. 미국 최고지도자가 히로시마에서 고개를 숙이고 나면 아베 정부는 전쟁 피해국으로서 사죄를 받았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베 정권은 군대 위안부와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게는 여전히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 한일 당국이 불가역적으로 위안부 협상을 타결 짓고 조만간 위안부 지원재단을 출범한다는 소식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의 소원은 아베 총리의 진심 어린 사죄밖에 없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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