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노조가 돈 모아 낙선용 비방광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 원칙 아래
후보자 직접 기부만 한도 규제
지원단체는 마음껏 모금하고 지출
기업이 직원에 특정인 지지 제안도
돈 선거 비판 부르는 ‘슈퍼팩’
모금액 절반이 부자, 대기업 자금
한국과 미국 선거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선거자금을 둘러싼 규제와 이에 대응하는 후보자들의 전략이다. 한국은 1958년 공직선거법에서 선거운동과 선거자금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선거 혼탁과 과열’을 막는다는 명분하에 ‘정해진 기간 내에, 정해진 사람만, 정해진 방식으로’ 선거를 치르도록 법제화했다. 반면 미국은 법으로 금지한 몇몇을 제외한 모든 걸 허용한다.
PAC통해 무한 선거자금 운용하는 미국
우선 두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한국은 후보자와 정당만이 선거자금을 받을 수 있지만 미국은 선거자금을 받는 사람 및 단체에 원칙적으로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미국 대선에서는 후보자의 선거자금과 후보자 이외 단체의 자금을 구분해야 한다. 후보에게 직접 기부되는 자금은 ‘하드머니’(hard money)로 부르며, 연방선거법에 따라 기부 한도를 정하는 정도만의 규제가 존재한다.
반면, 후보 이외의 단체가 후보자와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선거자금을 받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허용되어 있다. 이를 ‘독립지출’(independent spending)이라고 부른다. 개인을 포함한 모든 법인ㆍ단체가 합법적으로 선거자금을 모금할 수 있으며 기부 금액 한도도 없다. 심지어 후보와 협의만 하지 않는다면 정당도 이런 선거자금을 운영할 수 있다. 이를 ‘소프트머니’(soft money)라고 부른다.
미국은 선거자금 사용에도 사실상 제한이 없다. 한국은 선거활동 및 자금사용을 법에 자세히 규정해 놓고 있지만 미국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라는 원칙 하에 선거 자금 운용이 이루어진다. 선거자금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선거 운동의 종류와 한도에 제한이 없으며, 후보가 아닌 개인 또는 단체가 ‘독립지출’로 선거에 영향을 관여해도 제한이 전혀 없다.
예컨대 후보자가 아닌 개인 또는 단체가 선거자금을 사용하려면 ‘정치활동위원회’(PAC?Political Action Committee)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들은 후보자에게 직접 기부하기도 하지만 독자적으로 정치 광고를 만들어 무제한 유포할 수 있다. 이런 정치광고가 처음에는 ‘정책홍보광고’라는 이름으로 허용됐으나, 현재는 대부분 네거티브광고이며 심지어 유언비어까지도 ‘이러한 소문이 있더라’는 식의 형태로 유포될 정도다.
선거자금 확보를 향한 민주ㆍ공화의 신경전
하지만 미국인들도 ‘돈이 정치와 권력을 사려고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건국 이래 200년 가까이 느슨한 관리를 해 오던 미국이 최초로 의미 있는 규제에 나선 것은 1970년대 워터게이트 스캔들 이후이다.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를 설립해 후보자에게 직접 기부되는 ‘하드머니’에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이 때문일까. 1960년부터 72년까지 3배 이상 증가하던 대선 자금은 72년부터 2000년까지 완만한 증가세를 보였다. 또 기부금 한도 제한으로 소액 기부자들의 영향력이 커졌으며 선거자금에 대한 공공의 관심과 통제도 가능해졌다.
물론 하드머니 규제만으로 선거 자금을 완벽하게 관리할 수 없었다. 연방대법원이 70년대말 이후 지속적으로 관련 규제를 완화시키는 결정을 내려왔기 때문이다. 또 90년대 들어 정당ㆍ이익단체들이 후보와 직접 협의하지 않으면 무제한 사용할 수 있는 ‘독립지출’ 중 특히 ‘소프트머니’와 ‘정책홍보광고’를 공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자금이 대중매체로 유입되고 정당과 그 외곽 조직 영향력이 증가했다. 이로 인해 전통적으로 후보 개인보다는 정당 조직에 더 많이 의존하는 민주당이 공화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받았다.
이렇게 되자 공화당이 반격했다. 자신이 직접 자금을 조달하여 자유롭게 쓰기를 오랫동안 바래왔던 연방 상ㆍ하원 의원들은 2002년 선거자금개혁법(BCRAㆍBipartisan Campaign Reform Act)을 통과시켰다. 발의자의 이름을 따서 ‘매케인-파인골드’법으로 불리는데 하드머니 기부한도를 높여 후보자 본인들이 직접 받을 수 있는 선거자금을 늘렸다. 또 소프트머니와 정책홍보광고에 큰 제한을 둬 정당이나 다른 단체의 독립 선거자금 운영에 제동을 가했다. 이 법은 민주당 자금 줄을 크게 줄여서 불과 1년 후인 2003년에는 공화당 전국위원회가 민주당 전국위원회보다 약 3배 이상의 선거자금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민주당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소위 ‘527’이라고 불리는 단체가 정치적으로 재탄생했다. 이것은 미국 세법 527조에 있는 비과세 단체다. 특정 후보 당선이나 낙선을 명시적으로 표시하지 않고, 후보와 직접 협의하지만 않는다면, 모금 한도가 없으며 후보자에게 직접 기부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선거자금 지출에 제한도 없다.
과거 소프트머니를 통해서 행하던 투표자 등록 운동, 투표 독려 운동, 그리고 정책이슈에 대한 광고가 527 단체를 통해서도 가능해졌다. 미국 세법 501조c항에 있는 단체도 이용됐는데, 원래 비영리단체로 만들어진 이 501(c) 단체는 선거운동이 그 단체의 주된 활동이 아닐 경우 심지어 기부자들의 신상을 비공개로 할 수 있게 허용하여 기업들의 선거자금 기부 통로로 활용되고 있다.
이 와중에 공화당 지지 성향의 ‘시민연합’(Citizens United)이 제기한 소송에서 연방대법원은 2010년 선거자금개혁법의 위헌을 선언했다. 기업과 노동조합을 포함한 모든 단체는 선거활동과 선거자금 사용에 아무런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것이다. 심지어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특정 후보의 지지를 ‘제안’하는 행위도 허용되었다.
이에 따른 가장 큰 변화는 새로이 ‘슈퍼팩’(Super PAC)의 활동을 허가한 것이다. 기존 정치활동위원회(PAC)와는 달리 후보자에게 직접 기부할 수는 없지만, 특정 후보 당선과 낙선을 위한 모든 선거활동과 자금 사용이 무제한으로 가능하다. 대개 한 명의 대통령 후보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지며, 후보자와 협의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후보자의 전직 보좌진이 대표를 맞는 등 실질적으로 후보의 또 다른 선거운동캠프라고 봐도 무방하다. 더 큰 문제는 슈퍼팩에 기부되는 돈의 절반 이상이 극소수 부자와 대기업의 대규모 기부금이라는 점이다. 최근에는 개인-단체-기업이 501(c) 단체에 대규모 기부를 하고 이 단체가 다시 슈퍼팩에 기부를 하는 패턴이 증가하고 있는데, 501(c) 단체가 기부자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일부선 선거자금 개혁 목소리도
이처럼 미국 선거자금의 역사는 독특한 패턴을 보여준다. 선거운동과 선거자금을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지 규제하려는 시도가 결국 실패해 온 것이다. 후보자와 정당들이 다양한 형태의 편법을 개발한 것이 첫째 원인이며, 연방대법원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하에 정부 규제를 무력화시킨 것이 두 번째 원인이다. 하지만, 선거자금 개혁의 목소리가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여전히 높으니 앞으로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박홍민ㆍ미국 위스콘신대(밀워키)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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