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장진(북한)→판문점→하와이→서울, 2만1,000㎞ 기구한 여정
6ㆍ25전쟁 당시 치열했던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국군의 유해가 66년 만에 가족의 품에 돌아갔다. 약관의 나이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 군인은, 백골이 된 후에도 이 땅에 편히 잠들지 못하고 북한에서 판문점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지구 반 바퀴(2만1,000㎞)의 기구한 여정을 마치고서야 비로소 영면했다.
국방부는 21일 “고(故) 임병근 일병의 유해를 부산에 사는 큰조카 임현식(71)씨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1930년 5월 5일생인 고인은 6ㆍ25전쟁 발발 직후인 50년 8월 스무 살의 나이에 미 7사단 카투사로 입대해 같은 해 12월 6일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함경남도 장진은 고도 1,000m가 넘는 개마고원 일대의 절벽과 계곡 지형으로, 당시 미 해병1사단은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1만5,000명의 병력으로 중공군 13만명과 맞서 17일간 사투를 벌였다. 그 덕분에 군인과 민간인 20만명이 남쪽으로 탈출한 흥남 철수작전이 가능했지만, 미군 전사(戰史)에는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돼 있다.
임 일병의 유해는 이후 50년간 차디찬 장진의 야산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북미합의에 따라 미 ‘합동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사령부(JPAC)’가 2000년부터 북한지역에서 유해발굴에 나서면서 반전의 계기를 맞았다. 장진호 전투에서는 미군 600여명이 전사했다.
JPAC는 2001년 북한에서 발굴한 유해를 판문점을 거쳐 하와이에 있는 본부로 옮겼다. 정밀 감식결과 임 일병을 포함한 12구의 유해가 아시아계로 확인됐다. 한미 양국은 이들 유해를 모두 국군 전사자로 결론짓고 2012년 5월 국내로 봉환했다. 당초 북미간에 “미군 유해만 반출한다”고 합의한 만큼 발굴된 유해는 영영 북한 땅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신원확인이 늦어진 덕분에 북한도 반출과정에서 별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국군의 유해가 무사히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유해 12구 가운데 2구(고 김용수ㆍ이갑수 일병)는 국내 봉환 즉시 가족에게 전달했다. 유해와 함께 발굴된 인식표와 가족의 유전자검사 결과로 신원이 일찌감치 확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 일병의 유해는 이후 4년이 더 걸렸다. 국방부는 장진호 전투 전사자 중에 유해 없이 위패만 모셔진 분들의 유가족을 집중적으로 탐문했고, 마침내 지난 2월 임씨의 친척 6명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신원을 최종 확인할 수 있었다. 나머지 9구의 유해는 가족을 찾지 못해 아직도 보관 중이다.
임씨는 “삼촌의 전사통보를 받은 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삼촌이 돌아가신 것을 짐작했던 기억이 있다”며 “살아생전 삼촌의 유해를 모시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야 66년간 가슴에 맺힌 한을 풀게 됐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임 일병의 유해를 6월 대전현충원에 안장할 예정이다. 이로써 국방부가 2000년 이후 신원을 확인한 6ㆍ25 전사자 유해는 110구로 늘었다. 비무장지대 북쪽에는 아직도 4만여 구의 호국용사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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