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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덕 칼럼] 역사의 활용

입력
2016.04.2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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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모 기업의 인·적성시험, 즉 신입사원 채용 시험이 국가고시 이상의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비슷한 시기에 치러졌거나 곧 치러질 예정인 여타 대기업들의 채용 시험 역시 큰 주목의 대상이다. 개별 대기업들의 입사 시험이 전국적 뉴스가 되는 것을 보면서, 현재 우리 사회에 대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영향력을 실감하게 된다. 이런 현실이 물론 달갑지는 않지만, 오늘날 청년 세대 취업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해 본다면 이 시험들에 사회 이목이 집중되는 모습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 ‘입사고시’들에서 한국사와 세계사 등 역사 문항의 출제 비중이 크게 높아지는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현재 우리 대학들이 보여주는 인문학 홀대, 특히 역사 과목 경시 풍조와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 눈길이 간다. 벌써부터 취업 준비 학원가에서는 이 당혹스런(?) 현상에 대한 대책회의가 시작된 모양이다. 수험생들, 특히 대학에서 역사 과목들을 수강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공계 출신들이 느끼는 당혹감은 더 큰 것 같다. 평소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학문 분야라 취급 받던 역사학이 갑자기 취업 논의의 중심이 되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대기업들은 채용 시험의 역사 관련 문항 비중을 늘리면서까지 지원자들의 한국사 및 세계사 공부를 유도하고 있는 것일까. 모 기업 총수의 학부 전공이 역사학이었다는 점을 원인으로 꼽는 것은 그저 유머이다. 또한, 그 이유를 대기업들이 현재 청년 세대의 역사 지식 부족 문제를 걱정한 결과로 보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사실, 한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에서 제외된 시기가 길었고, 세계사는 사회과 교과목 중 채택률이 오랫동안 밑바닥을 맴돌았기에, 많은 우리 젊은이들의 역사 지식수준은 매우 낮다는 게 중평이며 이는 사회 각계가 개탄한 바였다. 하지만 개별 이익 획득이 목적인 대기업들이 정부를 대신해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이유는 만무하다. 그리고 이른바 글로벌화를 추구하는 우리 대기업들이 민족과 국가에 대한 자긍심의 ‘독점적’ 고취라는 현 정부의 역사교육 목표에 동참하기 위해 자신들의 인재 채용 방식을 손봤을 것 같지도 않다.

대기업들의 역사 학습 강조는 이를 통해 기업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역량이 길러진다는 그들 수뇌부의 믿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순수 학문인 역사학 공부로 쌓이는 인문학적 소양을 이윤지향적인 기업 생리와 연결시키는 것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과거사를 탐구하는 역사학은 현재의 시각에서 볼 때 가장 비실용적 학문처럼 느껴진다. 이미 우리 교육 행정과 대학당국은 역사 전공이나 과목에 소위 ‘비인기 분야’라는 딱지를 붙여놓지 않았던가. 이런 학문이 기업에 어떤 효용이 있다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하나의 답변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현재와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는 전통적 역사 효용론에 있다. 특히, 경제사나 기업사 같은 역사학 분과들은 현재 기업이 직면한 산적한 문제들에 교훈이 되는 사례들을 과거로부터 불러낼 수 있다. 일례로, 과거 유럽이나 일본의 저성장 시기 탐구는 오늘날 우리 기업에 큰 시사점을 줄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번 대기업 채용 시험의 역사 문제들은 경제사나 기업사에 특화되지 않았다. 주요 역사적 국면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다양한 분야의 사건들을 시기 순으로 배치하는 것과 같은 출제 문항들은 해당 시대에 대한 전반적인 학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기업 수뇌부의 마음속에는 과거를 지식의 보고로 이용한다는 전통적 역사 효용론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역사 학습이 길러주는 사고력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역사학은 과거를 현재의 잣대가 아니라 그 시대의 맥락과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그 과거에 비추어, 우리는 역으로 현재를 재평가 할 수 있다. 즉, 과거와의 비교를 거치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당연시하며 따르는 기존의 제도, 관념, 관행 등의 정당성과 타당성에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익숙하기만 했던 현재는 과거 학습을 통해 이제, 무조건적 받아들임이 아닌 비판과 재구성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현 상태를 비판하고 재구성하려는 바로 이 사고는 기업들이 그들 생존 및 성장에 필수라 믿는 혁신의 기초이다. 우리 기업들이 역사 학습을 ‘권고’하는 이유는 이런 사고를 가진 인재에 대한 필요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의 기업 문화가 현장에서 ‘혁신의 사고’를 얼마나 잘 받아들일 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아마도 그들의 거대 조직 체계와 집단주의적 분위기는 이에 걸림돌이 될지 싶다. 하지만 기업의 수뇌부가 ‘혁신의 사고’를 인문학, 특히 역사 학습을 통해서 함양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고무적이다.

적어도 대기업들은 우리 정ㆍ관계의 지도적 인사들에 비해 역사를 잘 활용하는 듯하다. 20여 년 전 모 기업 총수의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부는 4류”라는 발언이 새삼 떠오르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광주과학기술원 교수ㆍ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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