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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당당하다면서 숨어 다닌 북한 리수용

입력
2016.04.2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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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조정철 1등 서기관이 20일 존 F. 케네디 공항에서 한국 취재진에게 북핵ㆍ미사일에 대한 북한의 입장 등을 설명하고 있다.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조정철 1등 서기관이 20일 존 F. 케네디 공항에서 한국 취재진에게 북핵ㆍ미사일에 대한 북한의 입장 등을 설명하고 있다.

20일 오후 2시부터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JFK) 국제공항 4번 터미널에서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숨바꼭질이 벌어졌습니다. 21일과 22일 열리는 유엔 고위급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입국한 북한 리수용 외무상을 찾아 내기 위한 한국 특파원단과 북한 유엔대표부 외교관들의 싸움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 취재진의 완패로 끝났습니다. 미 당국의 엄호 아래 북한 외교관들이 펼친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에 리 외무상이 한국 취재진을 뚫고 공항을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시간대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당초 한국 취재진들은 JFK 공항의 8개 터미널 중 ‘에어 차이나’부스가 있는 ‘1 터미널’에 모여 있었습니다. 리 외무상이 전날 베이징에 모습을 드러낸 만큼 베이징 발 중국항공기를 타고 올 것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리 외무상이 취재진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는지, 지구 반대편을 돌아 중동 두바이를 거쳐 오후 2시15분께 JFK의 ‘4 터미널’로 입국한다는 사실이 전해졌습니다.

이렇게 하여 2시 무렵 ‘4터미널’에 모인 한국 취재진은 나름대로 최대한 길목 지키기에 주력했습니다. 한 회사에서 3, 4명이 나온 방송사 취재진은 입국장 좌우 통로를 모두 지켰고 주차장도 살폈습니다.

이윽고 2시 조금 넘어 북한대표부 자성남 대사가 부하 직원들과 미 당국 경호원 5,6명과 함께 입국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모두 긴장하고 있는 사이 느닷없이 북한 대표부 조정철 1등 서기관이 자 대사 무리에서 벗어나 한국 취재진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에 대한 북한의 입장, 핵과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 미국과의 협상 가능성 등에 대해 애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시에 한국 취재진이 그 쪽으로 몰리는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선글라스를 낀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조정철 서기관 안내로 리수용 외무상을 수행해 미국에 온 북한 외교관이 공항 출입문을 나서고 있다.
선글라스를 낀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조정철 서기관 안내로 리수용 외무상을 수행해 미국에 온 북한 외교관이 공항 출입문을 나서고 있다.

나중에 복기해보니, 조 서기관의 행동이 리 외무상을 공항에서 한국 취재진으로부터 따돌린 기막힌 묘수였던 것 같습니다. 조 서기관 주위로 몰려드는 바람에, 수 많은 4터미널 출영객(出迎客) 사이에서 한국 취재진이 누군지 확연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실제로 조 서기관을 빙 둘러서 얘기를 듣는 취재진에게 국무부인지 혹은 JFK공항 소속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국인 직원이 나타나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이후 두바이에서 비행기가 도착한 뒤 한국 기자들은 입국장 정면에서 리 외무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전 조 서기관 주위에 몰렸던 한국 기자들에게 다가왔던 미국인 직원들이 사진촬영 및 취재를 할 수 없으니 나가달라고 했습니다. 불응하는 기자들에게는 ‘경찰을 부를 수 있다’고 압박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 취재진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선글라스를 낀 조 서기관이 두 명의 북한 외교관을 안내해 주차장 쪽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또다시 취재진이 몰려 북한 외교관 사진을 찍고 나자 상황이 순식간에 반전됐습니다. 한국 취재진을 견제하던 미국 당국자도 없어지고, 입국장 주변에서 서성이던 경찰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리 외무상이 아마 그 때 귀빈실 출입구를 통해 공항을 빠져 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리 외무상은 용케 공항을 빠져나갔지만, 유엔 본부 앞 유엔플라자 호텔에서 결국 한국 취재진에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공항에서 북한 유엔대표부에 들렀다가, 여장을 풀기 위해 호텔에 들어서면서 미리 숙소를 알고 대기하던 한국 방송사 카메라와 마주친 것입니다. 방미 목적과 미국과의 협상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리 외무상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합니다.

리수용 북한 외무상이 토요일인 23일 아침까지 머물 뉴욕 유엔 본부 맞은편의 유엔 프라자 호텔.
리수용 북한 외무상이 토요일인 23일 아침까지 머물 뉴욕 유엔 본부 맞은편의 유엔 프라자 호텔.

일과성 해프닝 같지만 이날 소동은 한국과 미국을 대하는 북한의 태도와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또 리 외무상의유엔 나들이의 참 목적이 뭔지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목적이었겠지만 조정철 서기관의 발언에서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은 절실하게 희망하지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지금 정세에서 미국과 대화할 상황은 아니다”라면서도 ‘미국과 우회적으로라도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느냐’는 취지의 질문에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 총장과의 리 외무상과의 면담 가능성에 대해서는 “뭐 굳이 따지자면, 이 문제에서 더 적극적인 쪽은 우리(북한)보다는 반 총장 쪽이었다”며 목을 맬 정도로 시급하지 않은 것처럼 설명했습니다.

이날 리 외무상의 잠행을 둘러싸고, 유엔 주변에서는 그의 방미가 미국과의 대화를 모색하려는 측면보다는 ‘7차 당대회’를 앞둔 내부 다잡기에 목적이 있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공교롭게도 리 외무상이 뉴욕에 도착한 바로 이날 현 정세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담은 서류가 반 총장에게 전달되고 안보리에 회람되면서 유엔의 공식 문서로 채택됐기 때문입니다. 북한 대표부 자성남 대표가 이날 배포한 3개 문건에는 ▦한반도 긴장의 주범은 미국 ▦북핵과 장거리 미사일은 미국의 공격에 대비하는 방어용 무기 ▦북한은 협상을 원한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한 관계자는 “비핵화가 포함되지 않으면 미국이 결코 나서지 않을 걸 알면서도 북한이 대화를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북조선도 정상적인 나라이며, 유엔 등 국제사회의 일원’이라는 걸 북한 주민들에게 강조하려는 행보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뉴욕=조철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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