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 연구자들이 아쉬워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는 정조의 손자 효명세자다. 세도정치에 저항해서다. 그러나 수렴청정 3, 4년 정도 하다 왕으로 즉위도 못한 채 죽었다. 다 망한 뒤 되돌아보면 모든 게 아쉬워 그런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안타까운 인물로 꼽힌다.
이 효명세자의 스승이 추사 김정희(1786~1856)다. 추사체라는 걸출한 필법을 남긴 인물로 꼽히지만 그의 정치적 생애가 상처투성인 이유다. 널리 알려진 추사의 제주 유배생활은 효명세자 죽음 뒤 밀어닥친 보복이다.
홍익대에서 석ㆍ박사를 하고 30여년간 동양화가로 활동해온 이성현씨가 바로 이 점에 주목해 ‘추사 코드’(들녘 발행)라는 책을 썼다. 추사가 남긴 글씨를 가만히 보면 못다한 정치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이다. 안동 김씨 등 세도가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글씨로 교묘히 가렸다는 얘기다. 그게 ‘추사코드’다.
이씨의 해석은 파격적이다. 가령 ‘신안구가(新安舊家)’는 흔히 주자 가문의 고향인 신안의 오래된 집이니 주자학을 신봉하는 유서 깊은 집 정도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씨는 실제 쓴 글씨를 분석한 뒤 “세도가에 지금 도전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자”라고 읽어낸다. 명 마지막 황제의 가야금을 보관해둔 방이라는 ‘숭정금실(崇禎琴室)’ 역시 “망한 명나라 살리겠다면서 제 배만 채우고 있다”는 울분이 담겨 있다고 읽어낸다.
-추사를 추적한 계기가 있나.
“난을 그리다 추사를 알게 됐다. 계속 그리다 궁금해졌다. 예술적이라 해도 조선의 유학자는 기본이 정치가다. 글만 잘 썼으면 왜 귀양을 갔겠나. 그럼에도 글씨를 오직 조형성의 관점에서만 보는 게 이상했다. 조형성 문제도 그렇다. 기존 학자들이 문헌만 들여다본다면 나처럼 그림하는 사람은 붓질에 대한 감각이 있다. 쓰다 보면 왜 추사가 이 글자를 꼭 이렇게 썼을까, 의문이 계속 일어날 수 밖에 없다.”
-해석이 너무 튄다. 최완수, 유홍준 등 기존 해석도 다 반대했다.
“내가 되레 궁금했던 게 그 지점이다. 추사 글씨는 그림이다. 때문에 문맥을 따라 읽지 않으면 이 글자가 이 글자 맞나 싶을 정도로, 때로는 오자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파격적인 글자가 많다. 이 때문에 한자에 밝다는 이도 낱 글자로는 해석하지 못하는 글자가 있고, 지금도 해석할 때 한두 글자 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한자는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함축적인 문자 체계다. 이걸 단지 추사의 예술성이나 개성으로 해석한다? 난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추사의 정치적 이중화법으로 해석해야 풀린다고 본다.”
-쉬운 글자 뒤에 정치적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얘긴데.
“학문도 깊고 글씨도 좋은 추사의 글은 모두의 관심사였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한 획만 삐끗해도 바로 죽는다. 그런 상황에서 추사는 읽는 이의 수준을 뛰어넘는 어떤 글쓰기 방법을 구사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청나라 한족 지식인과의 교류에서 왔다고 본다.”
-옹방강 같은 이와의 교류를 말하나.
“그렇다. 한족 지식인들도 청조가 알아볼 수 없는 자기들 나름의 표기법이 있었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 방법을 받았고, 자기 나름의 표현법을 발견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번 책은 그런 해석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고 앞으로 3권을 더 내서 추사를 읽는 나만의 독법을 공개해볼 생각이다. 거기엔 추사의 걸작이라는 ‘세한도’도 포함되어 있다.”
-논문을 제출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학계 검증을 받아볼 생각은 안 했나.
“오히려 상식 수준에서 얘기해보고 싶었다. 이 책의 해석은 글과 그림을 오랫동안 만져온 내가 최선을 다한 내 나름의 해석이다. 이걸 넘어서는 더 좋은 해석이 나온다면 나의 해석을 깨끗이 포기할 생각이 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