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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입력
2016.04.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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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4월 19일

1960년 4월 25일 시위에 나선 초등학생들. 자료사진
1960년 4월 25일 시위에 나선 초등학생들. 자료사진

뉴라이트 성향의 보수단체 자유경제원이 이승만 시 공모전을 벌인 일이야 그러려니 하던 이들도 사회학자 한상진이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이 된 뒤 이승만을 국부(國父)’라 칭한 덴 뜨악해했다. 파문이 일자 그는 ‘역사의 역설’을 언급하며 “이 전 대통령이 도입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특히 학교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가 젊은 세대에 전파되고 확산됐다”고 해명했다. 그는 “역사를 한쪽에서만 보지 않고 균형 있게”보는 일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이승만은 토지개혁으로 근대적 자본가 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유상몰수 유상분배’ 토지개혁으로 상당수 전통 지주계급은 몰락했고, 소작 농민층은 분해됐다. 그는 의무교육제를 도입했고, 대학 등 고등교육 기관을 설립토록 했다. 그 덕에 1959년 만 7세 미만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구성원이 글을 익히고 교육을 받는 것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밑천이다.

하지만 그는 독재자였다. 52년 발췌개헌 54년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헌법을 유린하며 권력을 독점했고, 58년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 정적 조봉암을 사법살인했다. 국가폭력도 모자라 서북청년단과 정치깡패까지 동원해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에서, 85세의 그는 부통령마저 수족처럼 굴던 이기붕에게 맡기기 위해 대대적 부정선거를 자행했고, 마산 시민들의 규탄 시위를 폭력으로 제압했다. 뒤이은 4.19 혁명은 학생ㆍ시민과 경찰이 총격전을 벌이고 계엄군과 대치했던 준(準) 내전이었다. 그가 글을 익히게 했던 초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미국이 하야를 권하고 각료들까지 물러날 것을 청한 뒤에도 당직만 사퇴하겠다고 버티던 그가 하야 성명을 발표한 건 4월 26일이었다.

자유당정권이 “빨갱이들이 연루된 사태”라 부르던 4.19는 그 뒤 ‘의거’로 불렸고, ‘혁명’이나 ‘미완의 혁명’으로도 불렸다. 4.19로 272명(혁명 후 85명 포함)이 총과 몽둥이에 맞아 희생됐다. 한 켠에서는 이승만 찬양시 대회가 열리고 야당 정치에 발 담근 학자는 ‘역설의 균형’으로 그를 ‘국부’로 추존하자 하는데 다시 속절없이 4.19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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