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취업난에 캠퍼스 못 떠나
후배들 앞에서 자신 낮추며 자조
‘꼰대’ ‘개저씨’로 불리는 중장년과
차별화 위해 아저씨 낮춤말 자처
# 취업준비생 정모(28)씨는 스터디나 지인 모임에서 ‘아재(아저씨의 낮춤말)’를 자처한다. 후배들은 졸업 후에도 캠퍼스를 떠나지 못한 그를 ‘화석 아재(화석처럼 오래된 아재)’로 취급한다. 07학번 대학 새내기 시절만 해도 지금 나이가 되면 패기 넘치는 신입사원이 돼 있을 거라 상상했다. 하지만 단군 이래 최악의 취업난으로 정씨는 다음 허들을 넘지 못한 채 나이만 먹고 있다. 정씨는 18일 “학교 안에서 내 존재는 썰렁한 아재 개그나 구사하는 주변인일 뿐”이라며 씁쓸해 했다.
# 직장을 그만둔 뒤 올해 서울의 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 입학한 임모(36)씨도 아재 흉내내기를 하고 있다. 임씨는 “어린 동기들에게 행여 눈치 없는 꼰대로 비칠까봐 아예 불쌍한 이미지로 살고 있다. 비하의 의미가 담긴 ‘개저씨’가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털어놨다.
청년이라 불려야 마땅한 이들이 너도 나도 아저씨를 자처하고 있다. 아직 잔치가 한창일 나이인 2030세대인데도 온라인 커뮤니티에는‘16학번님들, 졸업생 아재입니다’ ‘30대 아재입니다. 제가 좀 썰렁해도 이해해 주세요’라는 자조 섞인 자기 소개가 판을 친다. 심지어 신조어를 몇 개 맞추는지, 썰렁한 말장난 식 유머를 얼마나 구사하는지 등 ‘진짜 아재’를 판별하는 인증 테스트까지 넘쳐 나고 있다.
실제로 17일 실시한 1975~96년생 남녀 141명 대상 설문조사에서 남성 응답자 97명 중 59.6%는 ‘나도 아재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들은 ‘시대 흐름에 도태될 때(34.3%)’, ‘어린 시절이 문득 그리워질 때(34.3%)’ 자신을 아재로 여긴다고 밝혔다.
기댈 곳이 많지 않은 아재들은 어린 시절을 공유하려 온라인으로 몰려들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1990년대 만화와 장난감 사진을 올리며 “이걸 본 적 있으면 최소 아재”라며 서로 안위를 찾는 식이다. 회사원 박종민(31)씨는 “나이만 들었을 뿐 마음은 마냥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고 싶다. 이리저리 치이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늙은 청춘’들은 왜 굳이 자신이 촌스러운 구세대임을 증명해 보이려 하는 것일까. 젊은 아저씨의 등장은 과거보다 팍팍해진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있다. 생물학적 성장은 멈추지 않지만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등 사회적 성장은 요원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 인구조사 결과를 보면 4년제 대졸자의 평균 졸업 소요 기간은 5년 12일, 이후 첫 취업까지 걸린 시간도 11개월이나 됐다. 학교를 떠나지도, 그렇다고 사회에 안착하지도 못한 경계인들이 스스로 아재라 낮추며 위안을 삼는 것이다.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과거와 달라진 탓도 있다. 소위 ‘알파걸’로 불리는 똑똑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이 대세가 된 상황에서 ‘개저씨’, ‘꼰대’로 불리는 윗세대 중ㆍ장년 남성들과 차별화 하기 위해 2030의 아재 표현이 급증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요즘 젊은 남성들은 영웅적ㆍ권위적 남성상을 버리고 오히려 여성의 감수성과 배려심을 갖춰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면서 “자신을 아재로 낮추면서까지 주변과 수평적 관계를 맺으려는 것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생존전략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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