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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엔 '연봉 30만원' 작가의 삶이 담겨있다

입력
2016.04.1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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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수목극 '태양의 후예'를 집필한 김은숙 작가. KBS 제공
KBS2 수목극 '태양의 후예'를 집필한 김은숙 작가. KBS 제공

지난 14일 막을 내린 KBS2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이야기의 힘보다 유시진(송중기) 대위라는 캐릭터의 훈훈한 매력 덕분에 인기를 끌었다. 직업 군인인 유 대위는 특전사 에이스 요원으로 능력이 출중한데다 패기 넘치는 남성미에 낭만까지 겸비했다. 강모연(송혜교)이 테러 집단에 납치돼 생사의 위기를 넘나들면 몸을 사리지 않고 적진에 뛰어 들어 연인을 살려 냈고, 지하철역에서 할머니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 주는 따뜻한 마음까지 지녔다.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운 완벽에 가까운 남성상이다. 유시진을 연기한 송중기도 ‘태양희 후예’ 종방 후 15일 연 기자간담회에서 “유시진 같은 남자가 있을까요?”라고 말했을 정도다.

KBS2 '태양의 후예' 속 송중기. KBS 제공
KBS2 '태양의 후예' 속 송중기. KBS 제공

판타지 같은 남성상을 그려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건 김은숙(43) 작가의 특기다. 그의 히트작을 보면 남자 주인공은 ‘백마 탄 왕자’인 경우가 많다. 평범하거나 비주류의 삶을 사는 여인과의 사랑을 주저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SBS ‘시크릿 가든’(2011)속 재벌 2세 김주원(현빈)과 ‘파리의 연인’(2004)속 한기주(박신양)가 대표적이다. 건축회사를 운영하는 ‘신사의 품격’(2012) 속 김도진(장동건)도 세상에 둘도 없는 ‘배려남’에 로맨티스트다.

이 판타지 같은 ‘훈남’들은 어디서 나왔을까. 김 작가는 최근 시민단체 참여연대의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 “순정만화 ‘소공녀’ 속 주인공이 다락방에서 가짜 빵을 만들어 먹는 상상을 하듯”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를 썼다고 했다.

극중 사려 깊은 남성 캐릭터의 모델로 삼은 건 두 남동생이다. 김 작가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학교에 내는 돈을 걱정하며 살았다”며 “나와 두 동생이 한 두 살 터울이라 비슷한 시기에 학비가 같이 들어갔는데, 내가 학교에 낼 돈을 안 내 혼나고 돌아오면 동생들이 안 가져가고 내게 그 돈을 몰아줬다”고 말했다. 이 뿐이 아니다. 김 작가의 두 남동생은 집에 우산이 하나 밖에 없는 데 등교 길에 비가 오면 누나 쓰고 가라고 자신들은 비를 맞고 갔단다. 김 작가는 “내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은 그런 쪽(남동생)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은숙 작가가 대본을 써 히트한 SBS '시크릿 가든' 한 장면. SBS 제공
김은숙 작가가 대본을 써 히트한 SBS '시크릿 가든' 한 장면. SBS 제공

김 작가의 배려심 많은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이 그의 남동생들을 닮았다면, 길라임(하지원) 등 어려운 환경 속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여자 주인공은 김 작가의 삶과 맞닿아있다.

김 작가는 가난한 집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김 작가가 들어간 첫 직장은 한 가구회사였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살림살이를 거들기 위해 사무실을 지키는 경리로 일을 시작했다. 친구들은 다 대학을 갔는데, 홀로 일을 하고 있는 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이 고단한 현실을 잊기 위해 김 작가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태백산맥’ ‘토지’ ‘장길산’ 같은 대하소설을 주로 읽었다. 분량이 긴 소설책들은 그에게 빡빡한 현실을 잊는 유일한 수단이자 도피처였다.

그렇다고 꿈을 꾸지 않고 산 건 아니다. 김 작가는 가구회사에 다니며 2,000만 원을 모은 뒤 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글을 써 보고 싶어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시험을 봤고, 합격해 서울로 상경했다. 학비를 버느라 또래 보다 5년 뒤에 대학교에 발을 들인 것이다.

처음에는 식구들에게 가구회사의 서울 본사로 발령이 났다고 한 뒤 강릉에서 무작정 짐을 쌌다. 2,000만원으론 전세 집을 얻었고, 등록금은 어머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아 학교를 다녔다.

바라던 대학에 들어갔지만, 작가로서 밥벌이는 쉽지 않았다. 김 작가는 드라마 작가 데뷔 전 연극협회에서 일을 했다. 극단 ‘미추’ 대표인 손진책 연출 밑에서다. 당시 김 작가는 연극 창작 극본들이 사무실로 들어오면, 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는 일 등을 했다. 이 일을 하며 김 작가는 작가로서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손 연출이 “네 글을 써 봐라”고 격려해 주면서다.

이후 김 작가는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무명이나 다름 없어 연봉으로 30만원을 벌던 때다. 김 작가는 윤하림 화앤담픽쳐스 대표를 대학로에서 우연하게 만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다. 김 작가의 연극을 즐겨봤던 윤 대표가 드라마 제작 일을 시작하자 자신이 좋아했던 김 작가를 드라마 작가로 발탁한 것이다. 그렇게 나온 김 작가의 데뷔작이 최민수 최명길 주연의 SBS ‘태양의 남쪽’(2003)이다. 이후 김 작가는 ‘파리의 연인’ ‘온에어’ ‘상속자들’을 비롯해 ‘태양의 후예’까지 줄줄이 히트작을 내며 한국을 대표하는 드라마 작가로 자리 잡았다.

김 작가는 자신의 삶을 개척한 것처럼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는 ‘태양의 후예’에 송중기를 캐스팅하기 위해 지난해 직접 그의 제대 현장까지 찾아갔다. 송중기가 출연했던 영화 ‘늑대소년’의 포스터를 들고 가 섭외에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어려웠던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도 김 작가는 좀처럼 구김살도 찾아볼 수 없다. 김 작가와 절친한 동료이자 tvN ‘시그널’을 쓴 김은희 작가는 “(김)은숙이는 위기에서도 ‘저 상황에서 이런 사랑을 하면 어떨까’를 생각하는 친구”라며 웃었다. ‘태양의 후예’의 관계자는 “김 작가가 워낙 적극적이고 그늘이 없다”며 “‘태양의 후예’ 속 윤명주(김지원)를 보면 꼭 김 작가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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