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의의 ‘예민해도 괜찮아’(북스코프,2016)를 신문의 신간 소개란에서 발견하고 서점으로 달려갔다. 지은이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임지선의 ‘현시창’(알마,2012) 덕이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줄임말을 제목으로 내세운 이 책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청춘담론이 얼마나 가학적인 것인가를 청년들이 당면한 피투성이의 현실로 반박한다. 임지선이 취재한 스물네 꼭지의 르포 가운데 ‘회사가 나를 성희롱했다’의 주인공이 이은의다.
삼성전기의 영업본부 대리였던 이은의는 서른한 살 때인 2005년 6월, 동유럽 출장길에 동행한 부장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출장에서 돌아온 그녀는 인사부장에게 부서장의 성희롱을 신고했다. 그 결과 가해자는 거액의 명예퇴직금을 받고 삼성전기와 같은 건물에 있는 분사회사의 임원이 되고, 피해자는 대기발령을 받았다. 이은의는 2007년 5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고, 2008년 5월에는 부서장과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에서 가장 ‘센 놈’으로 분류되는 회사와 전쟁을 하면서 지은이는 ‘광년’, ‘모지리’가 되었으나, 4년 동안의 싸움에서 인권위와 법원은 이은의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녀는 그때서야 사표를 내고, 2011년 3월 전남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서른일곱 살에 로스쿨 학생이 되었던 지은이는 현재 자기 이름의 법률사무소를 내고, 직장 내 성희롱과 직간접적 성폭행 사건을 전문으로 다루는 피해자 전담 변호사가 되었다. ‘예민해도 괜찮아’는 지금까지 수임을 했거나 법률 조언을 했던 성폭행 사건을 토대로 집필됐다. 바로 이런 특성상 이 책은 여성에게 성 범죄를 예방하는 방법이 아닌, 성 범죄 피해 여성에게 긴요한 사후 대처 방법을 가르친다. 평소 지인 관계였던 성폭행범은 대개 “성폭력 발생 전후로 계속해서 달달하거나 일상적인 문자”가 담긴 SNS를 보내 자신이 저지른 성폭행이 합의된 관계였던 양하는 물증으로 삼는다. 하므로 가해자와 모호한 내용의 문자 메시지나 톡을 주고받는 건 금물이다. 또 성 폭행범의 DNA가 묻어 있는 휴지 등의 증거물은 비닐봉지 말고 종이봉투에 넣어야 DNA 오염률이 적어진다.
지은이가 법정 싸움에서 승소하고 삼성전기에서 퇴사를 했을 때, 얼굴도 모르는 수백 명의 삼성 직원들이 전화나 이메일 등으로 격려와 지지의 뜻을 보내왔다. 하지만 ‘현시창’을 보면 정작 이은의가 동료들의 도움이 절실했을 때 “문제 제기를 하면 도와주겠다”던 동료들은 증언을 기피했다. 회사에서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그를 보며 “선배를 응원하지만 선배처럼 살 수는 없다”고 말하는 후배도 있었다.
직장과 학교에서 일어나는 성희롱과 강제추행 사건을 주로 맡았던 지은이는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가해자의 시선에 동일시”되어 있다면서,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갑이라기보다 을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을들이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감정이입하지 않고 가까이 지내고자 하는 위치에 감정이입한다”고 말한다. 다수의 입장에 서면 사는 게 쉬워지고, 강자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유리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창궐하고 있는 여성혐오도 같은 선상에 있다. “혐오자들은 자기보다 약한 상대들을 향해 폭력적인 말을 쏟아 붓는다. 청년실업도, 결혼과 출산의 문제도, 안 풀리는 연애 문제도, 하다못해 도로 위의 불편마저도 다 여자 탓, 장애인 탓, 이주노동자 탓으로 돌린다. 강자를 미워하고 싸우는 것보다는 약자를 미워하고 싸우는 것이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성폭행이나 성희롱을 남성의 억제하지 못하는 본능과 피해 여성의 잘못된 처신의 합(合)이라고 여기고,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의 초점도 거기에 맞춘다. 하지만 직장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성희롱과 강제추행을 ‘성적 문제’로만 접근하는 교육은 한계가 있다. 성희롱은 ‘힘희롱’이며 “권력관계 하에서의 아랫사람을 대하는 예의의 문제”가 더 근본적이다. 사회 곳곳의 갑을관계를 개선해야 성희롱 가해자와 피해자를 줄일 수 있으며,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공동체를 양질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회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제언은 놀랍고 뛰어나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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