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동남쪽 테라이 지역에 자낙푸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벽화를 그리는 여인들이 살고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 그림을 그리는 특별한 예술가들이다.
네팔을 생각하면 하얀 눈이 쌓인 히말라야가 떠오르지만, 남쪽에는 평원이 있다. 네팔 인구의 50% 이상이 살고 있는 테라이가 그곳이다. 넓디넓은 땅에서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다. 길거리에는 망고나무가 줄지어 있고, 눈이 시리도록 푸른 초록이 넘실댄다.
하늘에 기대 살던 그들에게 고난이 찾아왔다. 비가 오지 않으면 손을 놓아야 했던 시절, 극심한 가뭄이 닥쳤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 숙여 제를 올렸다. 하늘은 꿈쩍하지 않았다. 땅바닥이 갈라지고 마을 사람들 마음은 타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인이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흙벽에 그들의 간절함을 표현했다. 기적처럼 비가 쏟아졌다. 마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부터 자낙푸르 여인들은 하늘에 기도할 때 그림을 그렸다. 시골마을의 소박한 흙벽은 여인들이 그림을 담는 캔버스로 변신하게 되었다.
자낙푸르 여인들은 엄마와 할머니가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녀들은 흙벽에 망고나무와 코끼리와 새를 그렸다. 눈에 보이는 것을 담았다. 출산과 결혼, 축제도 소중한 소재였다. 진흙을 빻아 염료를 만들고 벽을 치장했다. 이것이 전통이 살아있는 그림 ‘미틸라 아트’(Mithila Mural)다.
자낙푸르 여인들의 작품은 독창적이었다. 전통을 담은 작품들은 미국과 영국 독일 벨기에 등 세계 각국에 선보여졌다. 그녀들은 뛰어난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자낙푸르 여인들은 그림을 통해 전통을 지켰으며,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을 누렸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개성 넘치는 작품도 훌륭했지만, 시골 마을 여인들이 전통과 예술을 통해 오늘의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더 마음을 울렸다.
자낙푸르 여인 만달을 만난 곳은 자낙푸르여성개발센터(Janakpur women’s development centerㆍJWDC) 공동 작업실이었다. JWDC는 그녀들을 지원하는 비정부기구(NGO)로, 여인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벽이 아닌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벽화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힘들다는 답이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곧 시작될 축제를 위해 벽화를 다 지웠단다. 축제가 시작할 때마다 그림을 다시 그린다는 것.
아쉬워하는 내 앞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이가 만달이었다. 집에 벽화가 남아있다고 함께 가자고 했다. 따라 나섰다. 40도가 넘는 날씨였다. 논밭 사이에 난 나무 그늘에는 아이들이 염소와 함께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소가 우르르 나타났다 사라졌다 반복했다. 바로 앞이라더니, 시간은 30분 이상 흘렀다. 괜한 욕심을 부렸나 하는 후회가 들려는 순간, 눈앞에 여느 미술관에서도 볼 수 없는 생생한 벽화가 나타났다.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네 아이들과 만달은 그런 나를 보고 까르르 웃었다. 매일 보는 벽화를 보고 놀라는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집 안에는 아들이 있었다. 만달은 영어를 못했지만, 아들은 유창했다. 만달은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만달이 그린 그림은 아들의 교육비로 쓰이고 있었다. 과거 기우제 때 그린 그림이 자낙푸르 마을 경제를 일으키고 자녀들 교육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전통을 통해 더 힘을 얻는다’(Empowerment through the traditon)는 JWDC의 슬로건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포토프린터를 꺼냈다. 만달에게 사진을 선물하고 싶어서였다. 벽화를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을 건네니, 만달은 큰 미소를 돌려줬다.
그녀들에게 푹 빠져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왜 그곳에 있는지 잊은 채 즐겁게 녹아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그녀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예술가가 되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 꼭 배워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렇게 세상이 조금씩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 전통을 살려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어가는 자낙푸르 여인들을 보며, 꽉 찬 에너지를 얻은 하루였다.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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