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길거리 민심 고스란히 담긴 ‘택시 신문고’… “정치인들이 읽어봤으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길거리 민심 고스란히 담긴 ‘택시 신문고’… “정치인들이 읽어봤으면”

입력
2016.04.14 20:00
0 0

택시기사 박기문씨

승객들 애환ㆍ희망 기록한 노트

두달만에 20권… 출판 계획도

[160407-14] [저작권 한국일보] 택시 신문고를 운영 중인 박기문씨가 14일 서울 독산로에 정차된 자신의 택시 앞에서 승객들이 신문고에 남긴 글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160407-14] [저작권 한국일보] 택시 신문고를 운영 중인 박기문씨가 14일 서울 독산로에 정차된 자신의 택시 앞에서 승객들이 신문고에 남긴 글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능력 없이 연봉만 축내는 임원이 부하직원을 짓밟는 회사에 다니는 대리입니다. 그래도 그만두지는 못하겠어요.” “흙수저로 태어났으면 평생 흙수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택시기사 박기문(50)씨의 ‘신문고’엔 승객들이 남기고 간 생생한 목소리가 가득하다. 꿈을 버리고 취업 잘되는 학과를 선택했지만 불행하다는 대학생, 공부 잘하는 애들만 위하는 담임선생님이 미워 죽겠다는 여고생,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다 보니 엉망인 장사를 접지 못하겠다는 자영업자까지….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인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힘겹게 이 시대를 버티며 살아가는 서민들이라는 점이다.

박씨는 올해 2월부터 택시 신문고를 시작했다. 중학교 졸업 후 전남 진도에서 홀로 상경해 자동차 정비공, 성당 관리원으로 일하며 산전수전을 겪은 박씨는 4개월 전부터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이민 가고 싶다” “살기 힘들다” 는 택시 승객들의 애환과 하소연을 기록으로 남기자고 마음 먹었다. 생면부지 택시기사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승객들을 위해 1,000원짜리 갈색 스프링 노트를 사 신문고로 명명했다. 그렇게 모은 신문고가 벌써 20권을 넘었다.

14일 만난 박씨는 요즘 승객들에게 ‘자신이 바라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솔직하게 적으라고 권한다고 설명했다. 불평ㆍ불만에 맞장구 치기보다 원하는 사회를 그려보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지름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지난달 한 새내기 대학생은 신문고에 ‘선ㆍ후배 문화가 자율적으로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도 꽉 막힌 선배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겁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박씨가 사연을 물어보자 학생은 “축구를 좋아해 부모님 반대도 무릅쓰고 체대에 들어왔지만 다짜고짜 군기만 잡는 선배들이 두렵다”고 했다. 얼마 뒤 박씨 택시에 탄 한 교수는 대학생의 글을 보고 “내가 환영회에 따라가서라도 신입생들 곁을 지켜야겠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이처럼 택시신문고에는 ‘길거리 민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그것처럼 거창하지 않고 소박한 바람이 대다수다. ‘아이들이 학대 받지 않는 사회’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지 않는 세상’‘복지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는 나라’ 같은 것들이다. 박씨는 “투표해 봤자 변할 게 없다고 자조하는 승객들을 많이 만났다”며 “서민들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원할 뿐인데 정치권은 이걸 모르는 건지, 모른 척 하는 건지 답답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조만간 신문고 사연들을 모아 책으로 펴낼 생각이다. 그는 “일부 승객들은 ‘행복하세요’라는 다섯 글자만 보고도 펑펑 운다”며 “활자의 힘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라고 했다. 이미 표지 디자인과 출판을 돕겠다며 나선 승객도 있었다.

“시민의 뜻을 가볍게 여기는 나라엔 미래가 없습니다. 정의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때가 오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20대 국회를 향한 민심이라며 박씨가 내보인 한 승객의 글귀였다.

신혜정기자 aret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