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별것 아닌 몸살을 앓는데도 ‘아픔’이라는 목적어를 함부로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세상에 존재하듯/아프고 안 아프고의 차이는 아픈 차이”(김희업 ‘통증의 형식’)라는 한 시인의 통찰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닐 테다. 어제는 아침 일찍 투표를 하고 용인으로 갔다. 소설가 김소진(1963~1997)이 세상을 뜬 것이 산매화 흩날리던 4월의 봄이었다. 벌써 19주기다. 몇몇 친구들과 매년 4월이면 꽃구경 가듯 용인의 산소를 찾아왔다. 몇 해 전이었나, 누가 사진이라도 찍어두자고 제안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나이 들고 늙어가는 게 보였던 것이다. 다들 반백을 넘어선 지 한참이었다. 그는 서른다섯 나이에 영원히 머물러 있게 되었지만, 우리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다. 그러긴 해도 다시 만나기만 하면 언제든 그 시간의 차이란 한 순간에 백지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가령 이번 총선 이야길 꺼낸다 하더라도 소통에 전혀 어려움이 없지 않을까. 몇몇 정당 이름만 익숙해진다면 말이다. 소설가답게 세상사에 시시콜콜 관심이 많았고, 사안마다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간추리려고 애쓰던 게 기억난다.
아무래도 무리였는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약을 먹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깨어나 TV를 켜니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기실 아침에 투표를 할 때도 그리 기운 나는 상황이 아니었다. 용인 가는 차 안에서도 친구랑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선거를 앞두고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주입된 프레임은 ‘야권 분열, 여당 압승’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과 집권 여당이 그 동안 국정 운영에서 보여준 오만과 무능, 퇴행의 정치가 합당한 민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지 않는가. 지역구도나 콘크리트 지지층 같은 말에 한국 정치의 착잡한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은 어느 만큼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부정되고 극복되어야 할 도그마를 지치지 않고 써대는 작태는 개개 시민들의 분노, 변화 가능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오만과 무례의 극치일 테다. 야권에 대한 적절한 견제와 경고의 메시지까지 포함해서 이번 총선의 결과는 민의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고정될 수 없다는 것,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아니 지극히 상식적으로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김소진은 19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소위 ‘운동권’ 학생으로, 그에게도 운동의 지속 여부는 만만찮은 갈등과 고민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소설 쓰기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생업으로 기자 생활을 병행했다. 그러다 마지막 2년은 아예 전업으로 글을 썼다. 그에게도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은 있었겠지만, 그는 리얼리스트였던 것 같다(물론 이 둘이 반드시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했다. 사실 이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그는 좀 집요하다 싶게 묻고 또 물어오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러다 보면 이쪽에서도 무언가 사태가 명료하게 정리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어쩌면 그에게 대화는 자신이 가진 틀이나 굳은 개념, 편견을 깨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김소진의 소설은 분명하고 정확했다. 그 ‘정확함’은 ‘있는 그대로’를 향한 거리감(距離感)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는 그가 80년대로부터 입은 이념의 세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한편, 거기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것은 자신의 태생이기도 한 미아리 산동네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한 대목이 있다. “그랬을 때, 즉 좋은 세상은 오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은 충분히 나쁘다 하는 비극적 상황에서 우리들 삶을 버티게 하는 건 뭐지?/그건…… 자존심 같은 게 아닐까요?”(‘그리운 동방’) 그래, 자존심 같은 거.
정홍수 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