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1차 세계대전 때 쓴 ‘철학일기’는 사실 어떤 책의 반쪽이다. 26세에 자원 입대한 비트겐슈타인은 자대에 배치 받고 이틀 후인 1914년 8월 9일부터 일기를 썼다. 사적인 내용으로 시작된 일기는 8월 15일부터 왼쪽과 오른쪽 면에 전혀 다른 내용이 담기기 시작한다. 왼쪽엔 군대에서 겪은 마찰과 우울감에 대해 암호를 섞어 쓰고 오른쪽에는 철학적 내용을 써내려 갔다. 훗날 ‘철학일기’란 이름으로 출간, ‘논리-철학 논고’의 토대가 됐다고 평가 받은 책은 이 일기의 오른쪽 페이지만 따로 편집한 것이다.
전우들을 “돼지떼” “건달 떼”라고 욕하며 이를 가는 철학자의 모습을 위대한 문장과 병렬시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텍스트를 원문 그대로 병렬시킨 세계 최초의 합본이 최근 국내에서 출간됐다. 신진 출판단체 ‘읻다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읻다’는 ‘연결하다’ ‘존재하다’는 뜻을 다 담기 위해 만들어낸 새 말이다. 28세부터 38세까지 젊은 출판인 12명이 모여 만든 읻다를 최근 서울 망원동 독립서점 ‘만일’에서 만났다.
“이 사람은 얼굴이 나가면 안 돼요. 회사에서 이거(읻다) 하는 줄 모르거든요.”
읻다 대표인 번역가 최성웅씨가 편집자 은지(가명)씨에게 비트겐슈타인의 얼굴로 만든 가면을 건네며 말했다. 읻다는 번역가,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 등 경력 10년 내외의 출판인들이 만든 독립출판집단이다. 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직장인이다. 퇴근 후 집에 가지 않고 모이는 이유는 아무도 내지 않는 책을 내기 위해서다. 읻다의 첫 결과물인 비트겐슈타인의 ‘전쟁일기’ 제작 과정에서 드러난 어떤 ‘극단’에서 이들의 무모한 열기를 감지할 수 있다.
“전쟁일기 합본은 기존 출판 시스템에서 나올 수 없는 책이에요. 한쪽 면이 완전히 빈 상태로 나가는 걸 어떤 편집자가 승인하겠어요. 저도 처음엔 반대였어요.” 8년차 편집자 김보미씨는 최근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뒀다. 좋은 책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던 ‘초짜’ 편집자가 책과 무관한 온갖 잡무에 시달려 학을 떼기까지 걸린 시간이 8년이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최성웅씨가 읻다에 대해 설명했을 때 그는 솔깃했다고 했다. “8년 전에 제가 갖고 있던 열정을 진짜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구나, 사실 좀 감동했어요. 그런데 돈을 안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 신뢰가 갔어요.”
읻다의 원칙 중 하나는 무급여다. 거꾸로 돈을 투자한 사람도 있다. 소셜펀딩으로 만든 1,500만원에 십시일반 모은 2,000만원을 합쳐 총 3,500만원으로 출발했다. 최씨는 “출간 3년 뒤부터 책에 대한 인세를 1%씩 가져가기로 했다”며 “똑같이 1%인 이유는 팔리는 책과 안 팔리는 책 사이의 격차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전쟁일기’와 함께 출간된 미즈노 루리코의 시집 ‘헨젤과 그레텔의 섬’, 루이-페르디낭 셀린의 소설 ‘Y교수와의 대담’은 최씨에 따르면 잘 팔릴 책은 아니다. “국내에 번역되는 외국 작품들의 편차가 굉장히 커요. 얼마나 팔리느냐도 문제지만 국내 학계 및 문단의 권력지형과도 연관이 깊죠. 유명한 학자가 좋아하면 전집이 번역되고, 관심이 없으면 한 권도 나오지 않아요.” 곧 이어 나올 에드몽 자베스 시집 ‘예상 밖의 전복의 서’, 로베르 데스노스 소설‘애도를 위한 애도/자유 또는 사랑!’은 읻다를 통해 국내 독자들에게 첫 소개된다.
이들이 좇는 ‘처음’은 번역에도 적용된다. “국내에선 인문ㆍ문학서 소비층이 주로 학자들이라 번역도 의미를 옮기는 것에 집중돼요. 하지만 제가 비트겐슈타인에 빠진 계기는 의미가 아니라 문체였어요. 학자가 아닌 대중을 상대로, 언어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전쟁일기’를 번역한 박술씨의 말이다.
열정을 동력 삼는 구조가 오래 유지될 수 없다는 건 읻다 멤버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최 대표는 “일단 10권까지 내고 이후에는 법인 사업체로 전환하는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아무도 내지 않는, 낼 수 없는 책, 적어도 10권은 확보됐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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