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변한 게 없다. 변화를 곧잘 발전과 동일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변함없다는 말은 퇴보와 동의어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마지막 식사를 한 식당 벽면에는 1550년 이 도시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호엔잘츠부르크 요새 아래 잘차흐 강 양편으로 자리잡은 4~5층짜리 빌딩이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도심에서는 지붕 아래 2개의 연도를 표시한 건물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왼쪽은 처음 건축한 해, 오른쪽은 가장 최근 수리한 연도를 적었다. 건축 연도는 1200년대부터 1700년대까지 다양하다. 잘츠부르크에서 변함없다는 말은 자부심의 다른 표현이다.
▦걸어서 잘츠부르크, 요새에 서면 견고한 자부심이 한눈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하얀 비둘기(Weisse Taube)’ 호텔을 나섰다. 건물 외벽에 비둘기 문장(紋章)이 붙어 있는 호텔이다. 오른편은 여우 호텔이고 왼편은 올빼미 서점이다. 독일어를 몰라도 알 수 있다. 중세시대 글 모르는 이들을 위해 상형문자처럼 그림과 조각으로 상점의 특징을 표현한 것이 전통으로 남은 흔적이다. 상가가 밀집한 게트라이데 거리엔 가게마다 내건 각종 문양의 금속공예 간판이 특별한 볼거리로 자리잡았다.
모차르트 동상이 자리한 광장을 통과해 구 도심으로 들어가는 게 잘츠부르크 관광의 정석이지만, 인도교인 모차르트 다리를 건너 강 맞은편 언덕으로 길을 잡았다. 카푸치너 수도원 바로 아래 산책로에 서면 도시가 한눈에 파악된다. 왼쪽 논베르크 수녀원부터 가장 꼭대기 호엔잘츠부르크 요새, 그 아래로 대성당, 레지덴츠 궁, 장크트페터 성당, 프란치스카 성당, 동료들의 성당이 파노라마처럼 연결된다. 상가는 성당 첨탑과 잘차흐 강 사이 좁은 구간에 형성돼 있다. 골목골목을 걸어도 하루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규모다.
언덕을 내려와 미라벨 궁으로 동선을 잡았다. 중앙 분수를 중심으로 양탄자에 수를 놓듯 화려한 꽃으로 고급스럽게 치장을 한 정원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조각상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곳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와 아이들이 도레미송을 불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도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게에 진열된 초콜릿에 새겨진 모차르트의 시선과 마주친다. 미라벨에서 도로 하나를 건너면 모차르트가 1773년부터 1781년까지 살던 집이다. 넓은 거실에 포르테피아노와 바이올린 등 그가 연주했던 악기를 전시했다. 한국어 서비스도 제공하는 오디오 가이드로 설명과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모차르트 생가는 강 건너 구 시가지. 삐걱대는 마룻바닥이 그대로인 부엌과 거실 등에 그의 가족과 음악인생 전반을 담고 있다. 스마트폰 텍스트가이드 앱(Mozart Geburtshaus)을 다운받으면 한글 해설을 볼 수 있다.
모차르트 생가에서 성당구역으로 나오는 길은 건물 사이 골목이 아니라 1층을 동굴처럼 틔운 연결 통로, ‘파싸지(Passage)’다. 그 좁은 통로 양편으로 상점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고, 조그만 공간이라도 나면 정원처럼 아기자기하게 장식했다. 이곳뿐만 아니라 성당과 상가 곳곳도 통로로 연결돼 있다. 결정판은 호엔잘츠부르크 요새에서 내려오는 길, 요새에서 나오는 유일한 길은 건물 안에서 계단을 돌고 돌아 외부와 연결된다. 막다른 골목이 아닐까 주저하게 되지만 통로는 어김없이 또 다른 길과 연결된다. ‘파싸지’는 잘츠부르크에서 걷는 즐거움을 더하는 요소다.
절벽으로 막힌 상가 거리 끝 지점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묀히스베르크 언덕 위의 현대미술관에 올랐다. 이곳에서 호엔잘츠부르크 요새 아래를 지나 논베르크 수녀원까지 산책길이 연결돼 있다. 맑은 숲을 거닐며 내려다보는 도심 풍경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하다.
어둑해질 무렵 호엔찰츠부르크 요새로 향했다. 1892년에 설치했다는 전동열차(푸니쿨라)를 타면 바로 중부유럽 최대의 요새이자 도시의 상징인 호엔잘츠부르크에 닿는다. 어둠과 반비례해 하나 둘씩 불이 켜지고, 푸르스름한 돔과 첨탑도 은은하게 조명을 받는다.
저녁 식사는 좀 호사를 부렸다. 장크트페터 성당 안에 위치한 식당에서‘돈 지오반니’, ‘피가로의 결혼’, ‘마술 피리’로 이어지는 오페라가 곁들여진 ‘모차르트 디너’로 마무리 했다(가격은 56유로). 약 150석 홀을 가득 채운 노랫소리가 모차르트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잘츠부르크의 밤을 감싼다.
▦숨겨진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를 찾아서
잘츠부르크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시다. 하지만 넘쳐나는 모차르트와 달리, 이 영화와 관련한 안내판은 놀라울 정도로 찾아 볼 수 없다. 소소한 고리라도 엮어 보려는 우리와 비교하면 이해하기 힘들다. 안내 책자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촬영지를 찾는 관광객이 한해 30만 명이라 자랑하면서도 정작 오스트리아인들은 영화를 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는 어떻게 찾아가야 할까? 잘츠부르크 여행의 주 목적이 이 영화라면 하루 2차례 진행하는 버스투어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도레미송을 불렀던 미라벨 궁전, 폰트랍 가족의 마지막 피신처였던 논베르크 수녀원, 대령 가족의 집으로 등장했던 레오폴츠크론 궁과 헬브룬 궁 등을 둘러본다. 시 외곽지역으로는 영화의 첫 화면인 샤프베르크 산 인근 볼프강 호수, 마리아와 폰트랍 대령이 결혼식을 올린 몬트제 교회까지 돌아온다. 미라벨 광장 인근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 4시간 동안 진행하는 ‘사운드 오브 뮤직’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과 하나가 되어 영화 속 음악을 합창하는 감동을 경험할 수도 있다.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대령의 집 레오폴츠크론 궁전은 호수 건너편에서 외관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막스 라인하르트가 꾸민 고풍스런 도서관과 베네치안 룸, 1730년대 건축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예배당과 연회장 등을 보려면 440유로를 내고 이틀간 투숙하거나(현재 호텔로 운영하고 있다), 5인 이상이 각자 12유로를 내고 별도로 투어 신청을 해야 한다. 해설도 ‘사운드 오브 뮤직’은 곁다리이고, 막스 라인하르트와 현재 건물 소유주인 비영리 단체 ‘잘츠부르크 글로벌 세미나’에 치중한다.
이 할리우드 영화와 엮이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증거는 또 있다. 대령의 큰 딸 리즐이 남자친구와 ‘16 going on 17’을 불렀던 유리팔각정도 원래 호텔 근처에 있었는데, 관광객이 몰리자 시 외곽 헬브룬으로 옮겼다.
‘사운드 오브 뮤직’과 관련된 또 하나의 명소 암벽승마학교(Felsenreitschule)는 폰 트랍 가족이 이별의 노래를 합창하고 대령이 에델바이스를 독창했던 극장이다. 대주교의 마구간이 있던 곳이어서 이름만 승마학교다. 개별 입장은 할 수 없고, 하루 2차례 대공연장과 모차르트 하우스를 함께 둘러보는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한다.
세계적인 영화 촬영지를 둘러본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슴 설레지만, 값싼(?) 할리우드 문화에 휘둘리지 않는, 모차르트로 대표되는 잘츠부르크의 자부심과 자존심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여정이었다.
잘츠부르크(오스트리아)=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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