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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봄이면 달린다. 기억의 망울을 따라

입력
2016.04.1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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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의 끝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끝이 있다. 도로 옆에 피어 있던 꽃들만이 기억에 남는다. 색들이 하 다양하여 나는 그 이름도 잘 모른다. 나를 스쳐간 수많은 인연에 대한 색색의 기억도 함께 망울을 터뜨린다.

도로를 달리는 것인지 기억을 달리는 것인지.

눈꽃이 앉은 양 하얀 꽃들이 가지 위에 소복이 앉아 있다. 벚꽃이다. 떨어지는 벚꽃을 손으로 잡으며 봄바람보다 더 환하게 미소 짓던 그 헌병 청년은 어디로 갔나.

몇 해 전 이 맘 때였고, 난 삼각지에서 녹사평 쪽으로 좌회전하던 중이었다. 국방부 앞은 벚나무가 울창했고, 봄바람에 만개한 벚꽃이 바람에 흩날렸다. 싸리눈 같기도 하고, 운동회 때 운동장에 뿌려지던 하얀 색종이 같기도 했다.

그 앞을 한 청년이 순찰하고 있었다. 그는 군복에 군모 차림이었다. 흩날리는 벚꽃이 그의 시야를 가림직도 했으나, 그는 귀찮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드러운 벚꽃잎을 손으로 잡으려 하며 환히 웃었다. 난 오른쪽으로 보이던 그 비현실적인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잠시 운전을 멈추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내게 벚꽃의 사자가 되었다. 봄의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알던 그 모습은 군복 입은 자 중 가장 근사하다는 송중기보다 더 아름다웠다.

까만 피부에 까만 머리결을 한 어린 소녀가 토요일 오후 엄마를 태운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집 앞 정류장에서.

어린 시절 엄마는 지방 근무 때문에 토요일 오후에나 충주에 오셨고 나는 지금은 두 살배기 아들을 키우고 있는 내 동생의 손을 잡고 버스 정류장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정류장 근처 돌멩이에 폴짝 뛰어 올랐다 내렸다, 강아지풀을 뜯어 동생과 서로의 코를 간지럽히다가, 들풀로 우산도 만들었다가, 풀피리를 만들겠다며 모를 풀들 속을 비워 입술을 대어 풀피리 소리를 내려 했다. 소리를 낼 줄을 몰랐고, 대신 얼굴은 빨개지고 입술은 파래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 당시 우리에게는 손목시계도 없었고 핸드폰도 없었다. 버스가 한 대 지나갔으면 20분쯤 지난 것이고 두 대 지나갔으면 40분쯤 지난 것이다. 가끔은 예정한 것보다 시간이 더 흐르기도 했고 그래서 석양이 보이려 할 때도 있었지만, 다음 버스에서는 엄마가 빨간 딸기를 들고 내릴 것이라는 희망만이 우리 자매를 설레게 할 뿐이었다.

난 지금 그때의 내 설렘보다 더 큰 설렘을 가지고 날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을 뵈러 가는 중이다.

까만 피부에 까만 머리결, 그리고 그보다 더 까맣게 빛나던 눈동자를 하던 어린 나는 어디로 갔을까.

또 달린다. 기억을 달리는 것인지 도로를 달리는 것인지.

그 끝에는 늘 할머니가 계시다.

단정히 쪽진 머리에 고부라진 등을 하시고 지금쯤 그 작은 키로 어디를 종종 거닐고 계실까. 저 하늘에서도 노란 꽃도 예쁘고 분홍 꽃도 예쁘다 소녀처럼 좋아하시려나. 치매에 걸려 참으로 아팠을 한 많은 과거 다 잊으시고 손녀들까지 잊으셨어도, 윤선이 한 명만은 기억하셨다. 공부를 잘 했다는 이유로. 공부를 제법 한 게 그때처럼 뿌듯했던 적이 없었다.

할머니가 떠나신 후 일곱살 조카 녀석의 손을 잡고 집 앞 갈대밭을 걷다 말고 쪼그려 앉아 울었다. 내 나이 일곱살 내 손을 잡고 걸으시던 할머니는 나보다 훨씬 컸고, 유독 산책을 좋아하셨다. 조카 녀석은 내 손을 잡고 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사람도 은행나무잎처럼 곱게 늙으면 얼마나 좋겠냐던 우리 할머니는 어디로 가셨나.

해마다 봄이 오고, 때마다 설렌다. 도로의 저 끝에 와 보면 막상 도로의 또다른 시작이 듯, 아마도 내 기억의 끝 또한 끝이 아니라 시작일 것이다. 봄 날 아침 서울시청에 걸린 현판을 보고 미소 짓는다. “보고싶다 말하고, 어느 새 꽃은 피고….”

임윤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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