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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정치는 선거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입력
2016.04.13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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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은 요지경이다. 난데없이 ‘어르신’들이 색색깔의 옷을 맞춰 입고 춤추고, 외면했던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여당 대표는 ‘옥새 투쟁’을 벌이고, 창작자의 저작물을 국회의원 후보가 홍보물에 무단도용하고, 후보의 가족 외모가 서바이벌 오디션처럼 홍보되고…. 이 아수라장 속에서 선거가 끝나면 결과에 따른 책임자 색출이 시작될 테고, 언제나처럼 20대가 대기 번호 1번을 뽑아 들고 앉아있다. 이번에는 성별 옵션도 붙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광고에서 ‘화장품만 꼼꼼하게 고르고 정치에는 무관심한’ 여성의 이미지를 내걸었다.

화장품은 개인적이고 비정치적인 무언가, 투표라는 공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와 대립되는 표상으로 제시된다. 정치에 관심 없고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요즘 것들(특히 여성)’에 대한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경우이다. 20대들은 (투표권이 있기에) 이 세상을 바꿀 잠재력을 가진, 그러나 (투표율이 낮기 때문에) 패기와 열정이 없거나 이기적인 청춘으로 호출된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발목 양말을 신었다고, 노란 리본을 달거나 대자보를 썼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던 고등학생이었던 경우가 수두룩한데 말이다. 투표율을 높이고 투표를 독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투표 여부는 그 사람의 정치적 관심이나 실천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적절하지 않다. 투표는 정치적 행위이지만 정치적 행위가 곧 투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투표율이 높으면 정치는 잘 굴러가고, 세상이 바뀌며, 권리는 저절로 확보되는가. 그렇다면 왜 투표율이 높은 노인층 빈곤율은 OECD 국가 중 1위인지. 몇 십년간 공고하게 구축된 시스템을 바탕으로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들인 20대를 신나게 착취해놓고 이에 신음하면 “너네 때문에 세상이 이 모양이니 투표해”라고 꾸짖으면 아아,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

선거가 끝나도 정치는 계속된다. 선거만이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독일계 유대인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정치 이론에서 ‘정치적 세계’란 다수의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다양성을 조건으로 하며, 동시에 그 다양성을 창출하는 인간 행위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는 행위를 통해 정치적 세계의 변화와 형성,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결국 ‘세계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정치적 세계를 형성하는 정치적 사건과 경험들을, 망각과 일반화에서 구하여 활성화하기. 그것이 진정한 정치이다. 정치적 세계의 복원이나 인간 공존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규범이나, (그런 것이 있다면) 진정한 인간본성의 회복, 혹은 이념적 패러다임의 승리가 아니라 다원성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승인하고 돌보는 정치적 행위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기계적으로 특정 정당만을 찍으며 잘못된 구조를 반복 재생산하는 개근투표자가 오히려 정치 무관심 유형에 해당한다.

한 당의 독주를 막고자 표를 모아달라고 호소할 때, 가장 큰 파이 두 조각을 어떤 비율로 나누느냐의 문제로 선거를 제한할 때, 최악과 차악의 대결로만 도식화할 때, 누군가의 자유와 출현은 사표와 부스러기 취급을 받는다. 전략적으로, 나중에, 조개는 해일이 지나간 다음에…. 이런 식으로 성소수자, 재해 피해자들, 장애인, 여성, 동물 등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렸고 투표가 끝나면 이슈조차 되지 않는다. 정치는 자유를 추구하며 실현하는 것이다. 아렌트적 의미에서 자유는 공동체와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실현된다. 계획되거나 획득할 수 있는 최종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공동의 일을 함께 논의하고 실행하는 정치적 행위 자체가 자유의 표지인 것이다. 자유가 내포하는 두 가지는 행위자 자신의 출현과, 공동의 세계에 대한 책임이다. ‘자신의 출현’이란 공동의 세계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인정투쟁이다. 이것들은 ‘대의를 망치는 사소한 분쟁’이 아니라 엄연한 정치적 활성화 행위이며 선거 이후에도 계속될 삶의 형식이다.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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