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중국 시안(西安)이다. 장안으로 불렸던 중국의 옛 수도, 시안 땅에 실크로드탐험대가 도착한 것은 2013년 4월4일. 3년 전이지만 대한민국 선거날인 오늘 13일처럼 비가 흩뿌리는 궂은 날씨였다. 그런데도 “건조한 땅에 단비가 내렸다”며 팔이 안으로 굽는 방식으로 자연현상을 해석하는 무리들과 인증샷 찍느라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날이 바로 1차 탐험을 떠난 지 보름, 대장정의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의전에 목을 매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탐험대가 옛 시안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장안성에 도착한 것은 이날 오후 3시였다. 장안성 북문에는 당나라 문무백관과 궁녀, 병사로 분장한 중국 의전팀이 탐험대를 맞아 성 안으로 인도했다. 한국에서 날아온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현지의 전재원 시안총영사도 들뜬 표정이었다. 옛 실크로드의 중심, 시안의 당나라 관리들이 외국 사절을 맞는 입당식의 현대판이었다.
동료 탐험대원들은 신이 났다. 몰골은 아니올씨다인데 표정 하나는 밝았다. 5,066㎞ 먼 길을 달려왔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뿌듯하고, 대견했을 터다. 성 위에서 찰칵, 대원들 표정 찰칵, 이리 찰칵, 저리 찰칵해서 무더기로 찍은 사진 중 두 장을 신문사로 전송하고 나니 공식 출장의 취재도 끝났다. 나도 해방이었다. “만세!”
보통 시안하면 떠오르는 곳은 진시황 병마용과 양귀비의 목욕탕으로 유명한 화청지, 온갖 비석을 한 자리에 모아둔 비림 정도다. 하나 하나 대단한 유적이다. 그렇지만 누가 나에게 시안에서 한 곳만 추천하라면 단연코 장안성이다. 우리 시대의 소설가인 조정래의 ‘정글만리’에도 장안성 얘기가 나오고, 최근 강호동과 이승기가 저팔계와 삼장법사로 분장한 TV 속 ‘신서유기’에도 이 곳을 빠트리지 않았다.
장안성은 높이 12m, 한 바퀴 돌아 제 자리로 오는 거리 13.74㎞, 폭 12∼14m다. 그러니까 두께가 10m가 넘는 네모난 성벽 위로 13㎞가 넘는 도로가 있는 셈이다. 탱크도 다닐 법했다.
아직 내 추천은 끝나지 않았다. 바로 이 성벽 위에서 자전거를 타보라는 것이다. 시안 입성 다음날 모처럼 자유시간, 탐험대원 대다수는 진시황 병마용을 보러 떠나고 말 안 듣는 기자 5명만 남았다. 기자 1명과 동행하는 것은 세간에 오리 10마리, 아니 돼지 10마리를 몰고 가는 것과 비교된다. 도무지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하지만 기자들끼리만 있으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나름 그 세계에도 질서는 있다. 그 날 돼지 50마리가 고른 목적지가 바로 하루 전날 갔던 장안성이었다.
택시 2대 나눠타고 장안성 북문에 도착하자마자 성벽 위로 올랐다. 자전거대여소가 바로 나온다. 3년 전 대여료을 돌이켜 보면 100분에 40위안, 오늘 환율로 7,065원이다. 2인용 자전거는 80위안(1만4,130원)이다. 5명이 각자 1인용 자전거를 빌렸으니 200위안(3만5,325원)이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야진’이라고 불리는 보증금도 내야 한다. 대 당 200위안이다. 물론 반납 때 돌려받는 돈이다. 1,200위안(21만1,950원) 내고서야 자전거를 빌릴 수 있었다.
페달을 밟았다. 성벽 틈으로 시안역이 보일 무렵 동료들이 갑자기 저팔계로 돌변했다. 매일신문 성일권, 영남일보 이현덕 기자가 카메라 들고 올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이미 때는 늦었다. 앵글이 나오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다. 직업본능이다.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곳이 장안성이다보니 사진 포인트로는 그저 그만이었다.
연합뉴스 손대성 기자는 옛날에 친구와 배낭여행할 때 시안역에 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의 식성은 놀랍다. 중국 음식에 단골로 들어가는 ‘샹차이’라는 고수가 있다. 우리 입맛에는 일단 거부감부터 드는 야채인데, 그는 없어서 못 먹는다. 여행가로 딱이다.
엉덩이도 아프고 다리도 쑤실 무렵 남문 쪽에서는 옛 군사들의 열병식 비슷한 것도 했다. 핑곗김에 자전거에서 내려 한참이나 구경했다. 성은 사각형이다. 눈여겨보면 장안성의 사각 모퉁이 형태가 다르다. 남동, 북동, 북서쪽 모퉁이는 직각형이지만 남서쪽은 원형으로 둥글게 되어 있다. 주원장의 명령이었다고도 하고, 성을 건립할 때 남서쪽에서 발견된 유적 때문이었다고도 하며, 풍수지리상 건물을 대칭되지 않도록 지어야 했다는 학설이 난무한다.
100분이 다 될 무렵 북문으로 돌아와 자전거를 반납했다. 동문, 남문, 서문에서 반납해도 보증금을 돌려준다. 영수증 보관이 필수다. 길가 가게에서 1, 2위안하는 전병을 우물우물 씹으며 옛 도심으로 들어갔다. 도심 종루 인근에 덕발장이라는 만두집으로 들어가 만두 5판을 주문하고 자리에 걸터앉았다. 이곳에서는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이 주방에서 나오면 수레에 한꺼번에 싣고 가다 주문영수증을 확인한 후 음식을 올려줬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만두 한 판 먹고나면 10분을 또 기다려야 했다. 맛은 꿀맛이었는데, 음식 기다리다 숨 넘어가는 줄 알았다. 우리나라였다면 주인을 골 백번은 불렀다.
그러고보니 상하이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원 근처 남상만두집도 1층 테이크아웃할 때와 2, 3층 식탁에 앉을 때 가격이 3배는 차이났다. 1층 야외에서 줄서있다 “다리 아프다”고 투덜대는 둘째딸 무서워서 3층으로 올라갔던 추억이 있다. 덕발장에서도 우아하게 먹을려면 3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덕발장 일대는 시안의 종루와 고루가 있는 곳이다. 중국 도시에는 으레 도심 성곽 중심에 종과 북을 치는 종루와 고루가 랜드마크로 자리잡고 있다. 이곳 야경도 장난 아니다.
때마침 그때가 청명절 연휴 기간이었다. 시안 시민과 관광객이 다 몰려든 것 같은 고루 근처 먹자골목과 기념품 가게 안쪽으로 이슬람사원인 청진사가 있었다. 동네 꼬마 녀석이 우리를 보더니 “강남스타일∼”하면서 좌우로 폴짝폴짝 뛴다. 사이가 노래 하나로 지구촌을 통일한 것이 실감난다.
사실 시안에서 진시황 병마용을 빼놓을 수는 없다. 무조건하고 일단 병마용을 보고난 후 선택을 해야 한다. 난 그때 시안이 3번째였다. 2005년인가, 그해 5월 한 달간 베이징에 머물 때 주말을 틈 타 혼자 베이징서역에서 기차타고 시안을 찾은 것이 처음이었다. 물어물어 병마용에 도착하니 가는 길 곳곳에 잡상인 천지였다. 그런데 이 잡상인들이 나한테는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외국인관광객에게 찰떡처럼 달라붙는 상인들이 나한테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베이징 이발소에서 평평하게 머리카락을 쳤어도 그렇지, 그날 시안의 잡상인들은 좀 심했다. 난 심하게 소외감을 느껴야 했고, 가뜩이나 넓은 얼굴에 평머리를 보면서 현지인보다 더 현지인 같은 싱크로율 만점의 몽타주를 반성했다.
두 번째는 정수일 선생님과 같이 시안과 란저우, 둔황을 둘러봤던 2012년 말이다. 그때 시안에서 뜻밖의 글자를 하나 만났다. 음식점 간판에 내걸린 한 글자였다. 바로 시안의 전통국수 ‘뱡뱡면’을 가리키는데 “뱡”이라고 읽히는 글자다. 총 57획인데 강희자전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다. 면발을 만들 때 이 소리가 난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도 한자하면 실크로드에서 만난 이 글자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jhju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