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부셔버릴거야.” 90년대 방영한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을 배신한 연인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했던 말이다. 드라마 역사상 명대사로 꼽히는 표현이지만 표준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깝다. ‘부숴버릴거야’라고 해야 맞다.
이런 실수는 발음이 비슷한 ‘부수다’와 ‘부시다’를 잘 구분하지 못한 탓이다. ‘부수다’는 ‘도둑이 문을 부수고 침입했다.’거나 ‘과자를 부숴서 아이에게 주었다.’처럼 물건을 깨뜨리거나 여러 조각으로 잘게 나눌 때 쓰는 말이다. ‘부시다’는 ‘솥을 말끔히 부셔 놓아라.’처럼 그릇 따위를 깨끗하게 하거나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라고 할 때처럼 빛이 강렬하여 마주 바라보기 어려운 상황에 쓰는 말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인생을 산산이 깨뜨려 못쓰게 만들겠다는 뜻을 나타내려면 ‘부숴버리다’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부숴버리다’와 달리 ‘부서지다’는 ‘부숴지다’로 쓰면 안 되고 반드시 ‘부서지다’로 써야 한다. 이미 중세국어에서부터 ‘부수다’와 ‘부서지다’는 각기 다른 말로 존재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부수다’의 어간 ‘부수-’에 ‘-어지다’가 결합하면 ‘부숴지다’가 되는데 왜 ‘부서지다’만 맞고 ‘부숴지다’는 틀렸다고 하는 걸까. 이것은 사실 선택의 문제로, 우리가 ‘부서지다’만 표준어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뜻이 같고 발음이 비슷한 말이 여러 개 있으면 그 중 하나만을 표준어로 삼는 것이 원칙이다. 혼란을 피하기 위한 것인데, 예를 들어 ‘봉숭아/봉선화’, ‘아내/안해’ 중에서 ‘봉숭아’, ‘아내’만을 표준어로 인정하는 식이다. 마찬가지 원칙에 따라 ‘부서지다’와 ‘부숴지다’ 중에서는 오래 전부터 써 왔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부서지다’를 표준어로 정한 것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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