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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까지 팠지만… 대기업 갑질에 무너진 중소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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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까지 팠지만… 대기업 갑질에 무너진 중소기업

입력
2016.04.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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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나비엔 부품 주문 약속에 생산설비 정지작업 마쳤는데

재정ㆍ인력 부실하다며 중단 통보…4년 다툼에 10억 빚ㆍ신불자 낙인

법원 “당시 회의록 보면 계약 성립, 1억 8,0000만원 지급” 판결

금형공장을 운영하던 김기청씨가 11일 경기 화성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경동나비엔의 일방적인 거래중단 통보로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명식 기자 gija@hankookilbo.com
금형공장을 운영하던 김기청씨가 11일 경기 화성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경동나비엔의 일방적인 거래중단 통보로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명식 기자 gija@hankookilbo.com

경기 군포시에 사는 김기청(59)씨는 매형 회사에서 와이어 커팅 일을 10여 년 배우다 2000년쯤 안양시 동안구 국제유통단지 내에 조그마한 공장(90여㎡)을 차렸다.

10여 년 만에 연 매출 10억 원을 돌파했고, 2011년에는 화성 발안으로 공장(1,485㎡)을 넓혀 이전했다. 매달 800만 원에 달하는 임대료가 부담이었지만, 대기업의 안정적인 일감을 받기 위한 과감한 투자였다.

공장을 옮기고 1년여 뒤 보일러 제조기업 경동나비엔 권모 팀장으로부터 하도급 제안이 들어왔다. 보일러 설비를 제공할 테니 ‘베드(받침대)’ 등을 만들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2개월 뒤인 7월19일 권 팀장 등을 만나 회의록도 작성했다. 김씨는 “계약서를 쓰자고 했지만, 권 팀장이 ‘우리는 회의록이 계약서나 다름없다’며 거부했다”고 했다. 공장 이전 등으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그로서는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난 2012년 경동나비엔이 자신들의 유압프레스 설비를 안착하기 위해 김씨의 공장 안에 파 놓은 구덩이. 유명식 기자 gija@hankookilbo.com
지난 2012년 경동나비엔이 자신들의 유압프레스 설비를 안착하기 위해 김씨의 공장 안에 파 놓은 구덩이. 유명식 기자 gija@hankookilbo.com

납품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경동나비엔은 김씨에게 프레스금형 등 설비 30여 개와 자제 20톤을 건넸다. 공장 안 땅을 파헤쳐 가로 3m, 세로 3m, 깊이 3m 크기의 구덩이 4개도 팠다. 자신들의 유압프레스 설비 4대를 들여놓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김씨는 자신의 설비로 부품을 시험 생산해 주기도 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양산을 기다리던 8월14일 권 팀장이 갑자기 말을 바꿨다. 그는 “재정이 부실하고 인력이 부족하다”며 거래중단을 일방 통지했다.

김씨는 뒤늦게 경동나비엔이 일감을 다른 업체에 넘겨주려 한 사실을 알게 됐다. 어처구니 없게도 불과 20일 전까지 자신이 데리고 있던 A씨 등 5명이 이직한 곳이었다. 김씨는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지만, 양측간 어떤 뒷거래가 있었는지 아직도 밝혀진 게 없다”고 했다.

“설비를 돌려줄 수 없다”며 버티는 김씨에게 경동나비엔은 유체동산인도 소송을 내고 “계약을 맺지도 않았는데 설비를 무단 점유하고 있다”며 파렴치범으로 몰았다.

대형 로펌을 동원한 공세에 김씨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난 4년여 단 한푼 수입 없이 대기업과 싸우고 있는 그에게 남은 것은 ‘신용불량자’라는 낙인과 10억원대 빚이었다.

그는 “기업이 부실해 대기업이 설비를 뺐다는 소문이 퍼지자 다른 일감마저 들어오지 않았고 남아 있던 직원들도 모두 떠났다”며 “대기업의 갑질 횡포에 수십억 대 전 재산을 소설처럼 날렸다”고 고개를 숙였다.

김씨의 외로운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경동나비엔을 상대로 맞대응, 지난해 손해배상청구소송 1심에서 일부 승소했다.

수원지법 제11민사부(부장 권순호)는 “계약서가 없더라도 회의록 내용 등에 비춰보면 양측의 계약이 성립된 것으로 보기에 충분하다”며 경동나비엔이 1억8,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대신 경동나비엔이 김씨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김씨의 유치권이 인정된다”며 모두 기각했다.

2013년 11월 이미 모든 설비를 경동나비엔 측에 되돌려준 김씨는 “사과는 아직 없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경동나비엔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상태다.

경동나비엔 측은 11일 “임금체불로 직원들이 김씨 회사를 떠나 당시 교섭이 무산됐던 것”이라며 “성수기 생산차질을 우려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유명식 기자 gij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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