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선거일이 코앞이다. 한 장의 투표용지는 기껏해야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지만 이를 모든 사람이 손에 쥐기 위해 인류가 흘린 피와 땀은 결코 가볍지 않다.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유럽에서도 불과 18세기 중후반까지도 왕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왕권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나서야 겨우 선거와 입법의회 구성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선거 참여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유를 찾아 피를 흘린 프랑스 혁명이었지만 누구에게나 투표권이 주어지는 보통선거는 겨우 1944년에야 프랑스에서 처음 현실화되었다. 여성의 투표권과 관련한 역사는 더욱 참담하다. 근대 민주주의 모범국이라는 영국도 참정권만큼은 남성의 권위주의에 번번이 봉쇄당했다. 그 빗장을 열어젖힌 건 용감한 여성에 의해서였다. 여성 참정권의 당위성을 주장해온 에밀리 데이비슨은 1913년 런던의 더비 경마대회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는 주장과 함께 달리는 말에 뛰어들었다. 데이비슨의 희생으로 영국 사회는 각성했고 1928년 드디어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게티스버그에서의 명연설을 한 이후 1870년 수정헌법 15조에 의해 흑인 남성들도 투표권을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주도의 미국 사회는 이런 저런 조항을 추가하여 흑인들이 투표권을 무력화시켰다. 마틴 루터 킹을 비롯한 수많은 인권운동가들의 피와 땀으로 마침내 1965년 8월 6일 린든 존슨 대통령이 흑인 투표권법에 서명하게 되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상징인 투표권은 오랜 역사의 투쟁과 희생의 산물이다.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의 사전 투표율이 12.19%로 집계되었다. 투표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열정은 눈물겹다. 인기 있는 연예인을 홍보대사로 위촉해 광범위한 선거참여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사전투표방식만 하더라도 유권자들이 가장 편리한 장소에서 가장 편안한 환경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온갖 배려를 다 하고 있다. 유동인구가 많은 공항과 기차역에 투표소가 설치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 투표율은 획기적으로 높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선거 참여는 제도적인 편리함보다 왜 투표를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정치권의 동기부여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국민들의 낮은 선거 참여가 주인의식 부재와 정치 무관심 때문이라고 질타하지만 그 원인은 도리어 정치권에서 찾아야 한다. 착한 선거가 아니라 ‘나쁜 선거’를 만들고 있는 정치권 때문이다. 국민들을 대표할 착한 후보자를 뽑아야 하는 공천 과정은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했다. 선거 과정은 이슈가 실종되고 막말이 남발하며 표 동냥에 급급한 상황이다. 언론 또한 국민의 눈높이에서 어떤 정당이 그리고 어떤 후보자가 문제가 있는지 속속들이 가려내기는커녕 여론조사 결과를 퍼다 나르기에 허덕대는 모습이다. 이런 선거를 국민들이 환영하고 기꺼이 발품을 팔아 투표소를 찾아갈 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나쁜 선거일지라도 착한 유권자는 투표를 해야 한다.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 잘못되었다면 우리의 의사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할 길은 투표에 있다. 국민들이 강력한 권리를 포기해버린다면 지금의 탁한 현실은 영영 변하지 않을지 모른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의 선택을 통해서라도 유권자들의 소중한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우리의 투표 한 장이 프랑스혁명의 영웅들, 영국 여성운동가인 에밀리 데이비슨,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의 피와 땀이 일구어낸 역사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쁜 선거에도 ‘착한 유권자’는 있어야 하는 법이다. 투표가 해답이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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