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중국의 한 전직 국무위원을 만났는데 환구시보(環球時報) 얘기가 나왔어요. 그는 한국 언론들이 환구시보 내용이 마치 중국 정부의 입장인 것처럼 보도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합디다. 환구시보는 전형적인 상업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얘기해도 좋으니 한국 특파원들에게 이 얘기를 꼭 전해달라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얼마 전 김장수 주중 대사가 취임 1주년을 맞아 베이징특파원들과 오찬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한 얘기입니다. 김 대사가 전직 국무위원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진 않았지만 주재 기간이 오래된 몇몇 특파원들은 특정인을 거론하더군요. 외교가에서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그 전직 국무위원은 다른 기회를 통해서도 환구시보가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이 아니라는 얘기를 종종 해왔던 모양입니다.
사실 환구시보는 한국 언론들의 외교ㆍ안보ㆍ국방분야 기사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아마 중국 언론 중에선 빈도수가 가장 많을 겁니다. 중국의 수많은 언론 중에서 현안에 대해 비교적 분명한 입장을 제시하면서도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人民日報)의 자매지’라는 권위(?)까지 갖고 있기 때문에 베이징특파원들의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민감한 현안과 관련해 환구시보의 보도는 굉장히 단호하고 직설적입니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으로 긴장을 고조시킨 북한을 향해서는 “점점 더 많은 중국인들이 북한을 점점 더 ‘나쁜 이웃국가’로 보고 있다”면서 “북한이 핵에 대한 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민심은 점점 더 나빠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혈맹관계인 중국이 북한을 향해 공식적으로 얘기하기는 참으로 부담스런 내용입니다.
한미 양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추진한 데 대해선 “친구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식탁 아래에 기관총을 놓는 것”이라고 정면으로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향해선 “강대국들 사이에서 ‘바둑돌’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죠. 북한과 인접한 동북3성 지역의 군사력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는 노골적인 주문을 내놓은 것도 환구시보였습니다. 한반도 배치가 확정된 게 아니니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미국이나 특히 한국을 비난하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환구시보가 총대를 맨 겁니다.
미국과 갈등하고 있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관련해선 “앞으로 양국 의지의 최종적인 카드는 핵 역량이 될 것”이며 “중국 정부는 흔들림 없이 핵 역량을 강화하고 핵 타격 능력을 부단히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핵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문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들 현안에 대한 인민일보(人民日報)와 신화통신(新華通信)의 보도는 특파원들 입장에서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인민일보는 세계적으로도 권위를 인정받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이고, 신화통신은 전 세계에 진출해 있는 중국의 국영통신사입니다. 하지만 사드 문제만 놓고 봐도 인민일보나 신화통신은 “중국의 전략적 안보이익이 침해되는 것에 반대한다”는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없습니다. ‘모범답안’인 셈이죠.
그러니 해외 언론들이 환구시보에 주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인민일보의 자매지라는 상징성도 있고, 또 내용 자체도 상당 부분 중국의 속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충분히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환구시보의 태생과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상업지로 출발했지만 단순히 상업지라고만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환구시보는 1993년 1월 인민일보(人民日報) 국제부 기자들이 만든 주간지 환구문췌(環球文萃)로 출발했습니다. 급변하는 미디어시장 환경과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민일보가 상업지 발간을 선택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환구시보 창간호는 당시 중국 신문시장에서 상당한 파격이었답니다. 타블로이드 판형으로 생김새부터 정통신문들과는 확연히 달랐고, 기사 내용도 가벼운 국제뉴스나 연예계 가십, 소소한 일상생활 등으로 채워졌습니다. 발행부수도 2만부에 불과했고요. 인민일보의 명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말 가십’ 정도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환구시보가 97년 들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해외 100여국에 상주하는 특파원ㆍ통신원들을 이용해 현지 소식을 전달하는 국제시사 전문지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게다가 논조 역시 강렬한 민족주의 성향을 띄게 됐습니다.
중국 전문가들은 96년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中國可以說不)이란 책이 수천만부가 팔리면서 몰아닥친 민족주의 열풍에 주목합니다. 환구시보가 중화민족의 부흥을 염원하는 대중의 요구를 포착해 분명한 방향을 정립했다고 보는 겁니다. 특히 중요한 대목은 환구시보가 민감한 외교적 현안과 관련해 자국 민족주의에 바탕한 공격적인 논조를 펴는 것이 결과적으로 중국 정부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게 99년 대만 독립 논란입니다. 리덩후이(李登輝) 당시 총통이 개헌을 통한 대만 독립을 추진하자 환구시보는 주간지임에도 거의 매일 특보에 중국 군부의 움직임을 부각시켰습니다. 사실상의 전쟁 분위기 고조였던 셈입니다. 중국 정부가 일관되고 단호하게 대만 독립 절대불가를 주장해온 점에 비춰보면 환구시보의 기사 내용은 사실상 중국 정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때를 지나며 환구시보의 발행부수는 100만부를 넘어섰고 발간도 주 3회로 늘었습니다. 뒤이어 2007년 일간지 전환, 2009년 영문판 ‘글로벌 타임스’ 창간 등으로 계속 성장했습니다.
이런 점들을 놓고 보면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환구시보와 거리를 두고 있지만, 환구시보를 통해 어느 정도는 실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선 환구시보가 다소 과한 의견을 주장함으로써 부담스러울 때가 있기는 하겠죠. 앞서 말한 김장수 대사 뿐만 아니라 한국대사관의 다른 주요 인사들도 중국 정부 인사로부터 “환구시보의 주장은 중국 정부와 무관하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중국 정부가 환구시보를 적절히 활용한다는 점은 도처에서 확인됩니다. 우선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직접 환구시보를 언급한 점이 그렇습니다. 시 주석은 지난 2월 19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중국중앙(CC)TV, 인민일보, 신화통신 등 3대 관영매체를 전격 방문하면서 노골적으로 언론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인민일보 방문 자리에서 환구시보를 가리키며 “나도 읽는다”고 말했습니다. 시 주석이 환구시보를 본다는데 어느 간 큰 중국 관료가 환구시보를 안볼 수 있겠습니까. 환구시보는 이튿날 “중압감이 산처럼 커졌다”고 했답니다.
중국 양회(兩會ㆍ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정치협상회의) 기간 중 왕이(王毅) 외교부장의 기자회견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첫 질문에 나선 환구시보 기자가 ‘제2의 항미원조’ 여부를 물었습니다. 최근 한반도 정세가 위중한데 혹시라도 전쟁이 나면 한국전쟁 때 중국이 북측을 도와 참전했던 것처럼 할 거냐는 도발적인 질문이었죠. 왕이 부장은 두루뭉실하게 답변하면서도 “환구시보의 질문은 늘 날카롭다”고 칭찬했습니다. 이를 통해 미국을 향해선 한반도 문제에 무력 개입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북한을 향해선 우리가 이번에 또 도와줄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를 각각 날린 셈이니까요.
환구시보는 인민일보 자매지라는 관영매체의 속성에다 중화민족주의라는 대중영합적인 중심메시지를 결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공식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환구시보와 무관하다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미국이나 서방을 향한 거침없는 불만과 비판ㆍ비난을 은근히 즐기거나 경우에 따라선 부추기는 측면도 커 보입니다. 환구시보가 사실상 중국 정부의 ‘돌격대’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베이징=양정대특파원 torc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