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미국과 멕시코를 방문하고 6일 귀국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미국 워싱턴에서 미국ㆍ중국ㆍ일본과 연쇄 정상회담에서 북핵 압박 외교를 펼쳤고, 한ㆍ멕시코 정상회담에선 양국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불씨를 살렸습니다.
박 대통령이 거둔 외교 성과보다 오히려 더 큰 화제가 된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는데요. 미국이 주최한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이 한국 시간으로 2일, 워싱턴 시간으로 1일 찍은 단체사진이었습니다. 핵안보정상회의 본회의가 끝난 직후 정상들과 국제기구 대표들은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잠시 ‘세면장’에 다녀오느라 사진을 찍지 못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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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외교적 사고’에 가까운 일입니다. 정상들의 기념 촬영은 다자 국제회의에서 제일 주목 받는 이벤트이니까요. 박 대통령을 수행한 외교ㆍ의전팀은 엄청나게 당황했을 겁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이 활짝 웃고 있는 기념 사진을 각국 언론이 내보냈는데, 우리 대통령이 빠져 있다니요.
박 대통령을 동행 취재한 기자들에게 청와대 참모들은 하루가 지난 뒤 비공식 설명을 내놓았습니다. “박 대통령이 발언 기회를 기다리느라 두 시간 가까이 열린 본회의 내내 자리를 지키다가 곧바로 세면장으로 갔다. 그 사이 기념 촬영이 진행되는 바람에 사진을 찍지 못했다”고요. 그러면서 청와대는 ‘세면장’이라는 표현을 유독 강조했습니다.
‘세면장’과 ‘화장실’은 어감이 확 다르지요. 대부분의 언론이 기사에서 ‘세면장’이라는 말을 사용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최고지도자, 특히 여성인 최고지도자의 품위를 고려하는 게 적절하다고 보았고, 아침에 신문을 펼쳐 읽을 독자들도 생각해야 했으니까요.
‘세면장’이라는 묘안을 생각해낸 건 박 대통령을 국회의원 시절부터 보좌한 정무직 참모였다고 합니다. 외교ㆍ의전 담당 참모들이 모여 앉아 “기자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손을 씻기 위해 자리를 비우셨다고 해야 하나…”하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이 참모가 아이디어를 냈다고 하네요. 한 관계자는 “세면장이라는 말을 듣고 모두 무릎을 탁 쳤다. 여성 대통령을 가까이서 오래 모신 참모라 센스가 다른 것 같다”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뿐 아니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도 잠시 자리를 뜨는 바람에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기사에도 썼지만, 이건 회의를 주최한 의장국인 미국의 엄연한 외교적 결례이자 실수입니다. 당시 회의 일정표를 보면, 정상들이 본회의를 마치고 15분 간 휴식한 뒤 다시 모여 사진을 찍는다고 적혀 있습니다. 미국이 본회의가 길어졌다는 이유로 공지된 휴식시간을 임의로 건너 뛰면서 손님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이지요.
더구나 기념 촬영 때 박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 바로 옆에 서기로 돼 있었는데, 미국측 행사 책임자들이 박 대통령이 없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네요. 2012년 서울에서 핵안보정상회의를 열었을 때 우리 외교부는 정상들 사진 촬영 이벤트에 대비해서 일주일 동안 예행 연습까지 했다더군요. 특히 정상들이 화장실에 가거나 자리를 비울 경우를 감안해 여러 시나리오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미국은 왜 그랬을까요?
하지만 청와대나 정부는 미국에 섭섭하다는 내색을 할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정부 관계자의 한 마디가 자칫 외교 문제로 커지거나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정부 인사들 사이에선 “올랑드 대통령도 마침 자리를 비운 게 천만다행”이라는 우스개도 나왔습니다. ‘52개국 정상들 중 박 대통령만 사진에서 빠졌다’는 기사는 부담스러웠을 테니까요.
최문선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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