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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포스트 포스터

입력
2016.04.1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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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아파트 담벼락에 붙은 선거 포스터를 보며 출근한 지도 열흘이 넘었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벽보 속의 인물들을 살펴 보았다. 각 당별 상징색을 메인 컬러로 삼아 후보자의 얼굴을 크게 부각시킨 포스터들이 나란히 붙어있다. 준비된 일꾼, 큰 일꾼이라는 자랑부터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각오까지 벽보 속 후보들이 활짝 웃으며 다짐하고 있다. 포스터 속의 다짐대로만 된다면 누가 뽑히든 ‘대한민국이 바뀌’고 내가 사는 구가 ‘잘살게’ 되고 ‘희망을 주는 깨끗한 정치’가 실현될 것만 같다.

드라마나 광고를 패러디한 재미있는 선거 포스터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시청률 최고의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단연 패러디 대상 1위고, 박카스나 초코파이 광고도 패러디 홍보물의 인기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이던 내 어린 시절에는 유난히 포스터를 그려오라는 숙제가 많았다. 불조심, 저축 장려, 반공, 삼림녹화, 가족계획, 혼분식 장려는 물론 쥐잡기 운동을 알리는 포스터까지 그려야 했다. 그림에 소질이 없었던 내게 포스터 그리기 숙제는 언제나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그림보다 포스터에 들어갈 표어에 더 공을 들였다. 그 전략은 가끔 효과가 있어서 ‘쥐가 내 밥을 훔쳐 먹어요!’나 ‘돼지 저금통이 진짜 돼지가 됐어요!’를 적어 넣은 쥐잡기 포스터와 저축 장려 포스터가 우수작으로 뽑혀 교실 뒤 게시판에 걸리는 일도 가끔 있었다. 제일 그리기 싫었던 포스터는 산아제한을 독려하는 포스터였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흔하게 들리고 ‘셋부터는 부끄럽습니다’라는 헤드라인의 광고가 신문에 실리던 시절이라 4남매인 우리 집이 야만 가족처럼 창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광고를 업으로 삼고 있는 지금 내게 선거 포스터를 만드는 숙제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만들까. 아마 포스터의 주 타깃인 유권자들이 어떤 정치인, 어떤 공약을 원하는지를 먼저 조사할 것이다. 그리고 후보자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단점은 최대한 방어하고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콘셉트를 뽑아낼 것이다. 경쟁 후보자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도 잘 살펴서 그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카피와 그림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일 것이다. 후보자의 지향점과 유권자 희망사항의 공약수 중에서 가장 자극적인 소재를 골라 포스터의 전면에 내세우자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아이디어 회의 끝에 좁혀진 서너 개의 포스터 시안을 의뢰인인 후보자에게 제시하면 몇 번의 수정작업 혹은 재시안 작업을 거쳐 포스터가 완성될 것이다. 이렇게 상상은 하지만 별로 하고 싶지는 않은 일이다.

포스터(Poster)라는 말의 어원은 기둥이라는 뜻의 포스트(Post)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기둥이나 말뚝에 붙여 놓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포스트에는 기둥이라는 뜻 말고도 접두사로 ‘후(後)[다음/뒤]’라는 뜻도 있다. 기둥 대신 벽에 붙은 선거 포스터를 보며 선거가 끝나고 난 뒤를 생각해 본다. 선거가 끝나면 포스터는 철거될 것이다. 어쩌면 천지에 선거 포스터는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우리들의 소망은 서운케 무너질지도 모른다. 포스터가 떼어지고 말면 그 뿐 내 4년은 다 가고 말아 하냥 섭섭해 울게 될지도 모른다. 영랑의 시처럼…. 선거가 끝난 뒤 포스터에 쓰였던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거 후에도 포스터의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당선자뿐 아니라 그 포스터를 본 모든 유권자들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약속을 지키는지 감시해야 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 다음 선거에서 심판해야 한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의 당선여부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 선거 후, 즉 ‘포스트 포스터’를 준비해야 한다.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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