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적 이타주의자
피어 싱어 지음ㆍ이재경 옮김
21세기북스 발행ㆍ272쪽ㆍ1만6,000원
실천윤리학자이자 동물해방론자로 유명한 피어 싱어의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비유하자면 ‘알파고 이타주의’다.
영화 ‘아이 로봇’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스프너 형사(윌 스미스)는 로봇을 믿지 못한다. 자신과 어린 여자아이가 동시에 물에 빠졌을 때 로봇은 두 사람의 생체신호를 감지한 뒤 생존 확률이 높은 스푸너 형사를 구했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여자 아이부터 구했을 거라는 게 스푸너 형사의 주장이다. 사태를 냉정하게 보자. 만약 스푸너 형사를 구한 게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 위로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당신의 빠른 판단으로 한 명이라도 구했으니 다행이라 하지 않았을까.
AI의 윤리적 판단 문제는 어쩌면 판단 그 자체보다는 이질감에서 나오는 질투심이나 심술 같은, 인간적 반응의 문제 아닐까. 여자 주제에, 흑인 주제에 중요한 문제를 제 머리로 판단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온 한 때의 오랜 습성처럼 말이다.
싱어는 딱 잘라 스푸너는 틀렸고, AI가 옳았다고 말한다. ‘아이 로봇’ 사례는 윤리학에 지겹도록 등장하는 ‘트롤리 딜레마’의 변용인데 이 문제에서 싱어는 망설이는 법이 없다. 선로를 바꿔 5명 죽을 것을 1명 죽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면 1명을 희생시키는 게 맞다고 선언한다. 이타주의는 효율적이어야 한다.
책의 초점은 기부 행위다. 기부 행위도 당연히 “감정이입이나 공감보다는 논거에서 동기를 부여”받아야 한다. 스스로 비논리적이라 생각하는 이는 없으니 이 정도 표현으론 감이 안 온다.
이렇게 말해보자. 어려운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메이크 어 위시’는 그만 둬야 한다. 그 이벤트할 돈으로 다른 이를 돕는 게 낫다. 길 잃고 버려진 개나 고양이를 안타까워하는 것도 그만둬야 한다. 더 시급한 것은 식용으로 길러지는 와중에 온갖 고통에 내버려진 축산동물을 돕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고아원이나 북한 어린이를 돕는 일은 별로 시급하지 않다. 그보다는 아프리카 아동을 지원하는 게 더 낫다. 이유는 간단하다. 같은 비용을 들여서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기부 행위이기 떄문이다. 민족, 국가, 인종 등 모든 장벽 따윈 다 뛰어넘어야 한다. ‘효율’을 따져야 한다. 글로벌 금융자본주의가 최고수익률을 노리는 것처럼.
작심 비판도 쏟아놨다. 효율을 따지지 않고 감정적으로 기부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건 실질적 도움이 아니라 자신이 돕고 있다는 만족감이다. 이런 이들일수록 자신의 돈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정작 별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 자신이 낸 기부금 가운데 10% 이상이 운영비로 쓰인다고 하면 깜짝 놀란다. 낭비라고 여겨서다. 그렇기에 기부금은 소액이고 불규칙적이고 금세 중단된다.
효율적 기부를 추구하는 이들은 다르다. 이들의 관심사는 단 돈 1달러를 내더라도 그 돈이 진짜 도움이 되느냐다. 해서 기부단체를 연구하고 재정보고서를 탐독한다. 이런 사업도 하고 저런 사업도 하는 식의 백화점식 자선단체는 사절이다. 기부금에서 운영비 비율은, 더 좋은 사업 개발 등의 합리적 이유가 있다면 높아도 된다. 더 효율적으로 돕겠다는 얘기니까. 이런 다각도 검토 결과 내 돈이 정말 많은 도움을 준다고 확신한다면, 이들은 거액을, 지속적으로 내놓게 된다.
책의 전반부는 실제 사례다. 출발점은 어느 정도 먹고 살 거리만 있으면 그 외 수입은 모두 기부하라는 싱어의 1972년 논문 ‘기근, 풍요, 그리고 도덕’이다. 놀랍게도 이 논문에 감동받아서 실제 행동하는 이들이 나온다. 철학과 최우수생이었던 맷 웨이즈는 철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월스트리트를 택했다. ‘교수 수입의 10%’보다 ‘증권사 월급의 50%’를 기부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 판단해서다. 토비 오드는 연 3만4,000달러 수입 외엔 모두 기부한다. 아내인 버나뎃 영도 4만2,600달러 수입 외엔 모두 기부한다. 전 재산을 기부하고 수도승처럼 도 닦으며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집 구하고, 아이들 키우고, 휴가 때 해외 여행 다녀올 정도의 돈은 남겨둬도 된다. 싱어 본인은? 부끄러워하며 머리 긁적이면서 내놓은 수치는 이렇다. 결혼 초엔 소득의 10%, 지금은 30%, 최종 목표는 50%다.
좋은 뜻은 알겠는데, 굳이 남들의 기부 행위를 감정에 치우친 비효율적 행위라 할 필요까지 있을까. 어쩌다 마주친 아이의 슬픈 표정에 눈물 방울 글썽이며 10만원을 내미는 행위 자체를 못마땅해 여길 필요까지 있을까. 아니 불쌍한 아이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뭔가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 아닌가. 또 그렇게 서로 격려해가며 남을 돕는다는 건 아름다운 것 아닌가.
싱어는 ‘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해 “인식 가능한 개인을 향한 정서적 공감을 넘어”서서 인지적 공감으로 나가야 한다고 못박는다. 효율적 이타주의가 냉혹하고 차가운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열정이라는 게 싱어의 반박이다. “차가운 합리적 행동이 뜨거운 열정을 희생시킨다는 건 명백한 오해로 오히려 효율적 이타주의야말로 우리의 열정”이라고 말했다. 진보라는 게 있다면 “사유 능력의 진보”일 것이요 “이성이 감정을 낳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성에 대한 반감 때문에 포스트모던의 바람을 타고 요즘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된 스피노자 철학의 ‘정동(Affective)’, 이성에 대한 반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정의 복권을 주장하는 마사 누스바움의 ‘공감(Empathty)’과 한 번 비교해볼 만한 논리다.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헨리 시즈윅 이래 공리주의 철학의 맥을 잇고 있다 자부하는 싱어의 입장이 명백히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책에는 대안적 기부단체들의 활동, 기존 기부단체들의 반박, 싱어의 재반박이 자세히 담겨 있다.
사례와 논쟁 위주로 책은 흥미롭다. 흥미롭다가 부러워진다. 세계 패권국이니 뭐니 하면서 아무리 가자미 눈을 뜨고 아니꼬운 말을 늘어놔도, 미국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남에게 더 도움 될까를 두고 논쟁하고 실천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논쟁하고 실천하는 가치는 뭘까.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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