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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능수벚꽃 아래 내 나름 추억 만들기

입력
2016.04.08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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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봄날이었다. 스물두 살 미국 청년 포스터 헌팅턴은 친구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았다. 저녁을 먹는 동안 친구들은 파트너를 찾는 인터넷사이트며 상대를 유혹하는 방법에 대해 떠들었다. 그때 헌팅턴에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집에 불이 났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무엇을 들고 나올 것인가?’ 이 질문을 통해 개인적인 취향과 철학을 엿볼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 사진작가는 카메라와 사진 원판을, 음악가는 아끼는 기타와 최초 노래가 메모된 냅킨을 챙길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선물한 소설 ‘분노의 열매’ 초판을 꼽았다. 그들 삶의 은밀하고 섬세한 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목록이었다.

며칠 후 헌팅턴은 똑같은 질문을 인터넷에 올렸다. 4주 사이에 전세계 3,000명 넘는 사람들이 답신을 보내왔다. 뉴욕 랄프로렌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던 헌팅턴은 사표를 내고 사연을 보낸 사람들을 찾아 미국 횡단여행을 떠났다. 그가 직접 인터뷰하고 사진 찍어 2012년 7월 ‘The Burning House’라는 제목으로 낸 책은 흡사 궁극의 추억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찻잔, 캔디, 구두, 공구함, 메달, 테디베어, 가족사진, 편지….

아마도 헌팅턴은 그보다 20년 전 오클랜드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1991년 10월 아침, 거의 진화되었다고 믿었던 산불의 불씨 한 톨이 바람을 타고 솟구쳐 인근 주택가 나무에 옮겨 붙었다. 불길은 맹렬하게 번져 11초당 한 채 꼴로 집을 집어삼켰다. 소방관 포함, 25명이 사망한 이 화재로 인해 주민들은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생사를 가르는 암흑천지로 바뀌는지를 몸서리치게 경험했다. 어린 자녀를 앞세워 시뻘건 불길을 뚫고 피신하던 그 짧은 순간, 사람들은 어쩌면 다시 못 올 보금자리에서 소중한 물건들을 서둘러 챙겼다. 언론에 감동적으로 소개된 기사에 따르면 고가의 미술품이나 보석, 유가증권을 집어 든 이는 거의 없었다. 온몸에 재를 뒤집어쓴 생존자 대다수 손에 들린 것은 오래된 사진첩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들이 경험한 정신적 카타르시스는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생의 최종심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했다.

꽃들을 한꺼번에 피워낸 봄날 서울의 공원. 사람들은 추억 만들기에 분주했다. 능수벚나무 아래 주름치마 곱게 입은 모녀가 웃음을 짓고, 유모차에 아이를 앉힌 부부는 셀카봉을 들어 셔터를 눌렀다. ‘누군가에게는 이 봄이 평생 기억될 소중한 순간으로 남을 수도 있겠구나.’ 그때 나른한 감상을 와장창 깨뜨리는 소리가 울렸다. 어깨띠를 두른 국회의원선거 운동원들이 공원에 들이닥쳤다. 화사하게 웃던 사람들의 표정에 짜증이 올라왔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봄 풍경에 쉽사리 스미지 못하는 그들의 절실한 눈빛과 맞닥뜨리자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러니까 현실은 간단치 않다. 오클랜드 화재와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으니, 우리에게는 궁극의 추억보다 시급한 오늘의 삶이 엄존한다는 사실이다. 화염 속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서로를 보듬던 주민들은 몇 달이 지나 보상금 청구와 주택신축 문제를 협의할 때가 되자 의견이 갈리고 공격하며 서로 배신하기 시작했다. “자존심, 탐욕, 죄책감…, 온갖 너저분한 감정에 휩싸이는 게 싫지만 어쩌겠어요. 살아가려면 제값을 받기 위해 싸워야죠.” 화재 직후 재투성이 앨범을 끌어안은 채 오열했던 한 남자의 말은 삶의 다층적인 풍경을 콘트라스트로 증언한다.

어깨띠를 두른 사람들에게 들이밀 내 몫의 청구서를 떠올렸다. 반쯤 무너진 집의 보상금을 꼼꼼히 정산하고 견실한 새집 설계도를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다. 공원을 나서는데 사전투표소를 안내하는 화살표가 보였다. 들어가 투표를 했다. 4월 13일, 그 날은 내 방식대로 봄 추억을 만들 것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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