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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홈런, 땅에는 치킨

입력
2016.04.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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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에서 먹는 치킨은 왜 맛있는 걸까. 하늘에 홈런볼이 날면, 땅에서 먹는 치맥은 저절로 젖과 꿀이 된다. 강태훈 포토그래퍼
야구장에서 먹는 치킨은 왜 맛있는 걸까. 하늘에 홈런볼이 날면, 땅에서 먹는 치맥은 저절로 젖과 꿀이 된다. 강태훈 포토그래퍼

얼마 전 중국 단체 여행객들이 인천에서 ‘치맥’ 파티를 벌였다는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물경 6,000여 명 외국인이 한 자리에서 한 뜻으로 치킨과 맥주를 즐겼다니, 이제 치맥은 궁궐 관광이나 한복 기념사진 못지 않은 소중한 문화 유산이요 관광 자원이 된 모양이다. 이게 다 ‘별에서 온 그대’ 덕분이요, 치맥 ‘먹방’을 펼친 배우 전지현 덕분이다.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린 지난 1일 저녁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는 더 큰 규모로 치맥 파티가 벌어졌다. 7,000여석이 팔려나간 이날 경기는 지지부진한 가운데 2대 1로 롯데 자이언츠가 승리를 가져갔지만, 진정한 승자는 롯데도 넥센 히어로즈도 아닌 BHC인 것 같았다. 이미 고척스카이돔 앞에 ‘별그대’의 주인공 전지현이 치킨을 들고 서있었다(물론 입간판으로!). 그 화사한 등신대를 지나 올 시즌 새로 개장한 야구장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치킨 한 마리씩을 챙겨 들었다.

어느 야구장엘 가든 하차 지점에서부터 야구장 입구를 지나 관중석까지 이어지는 동선에는 온통 치킨 냄새가 가득하다. 이미 야구와 치맥은 뗄 수 없는 짝꿍이다. 야구가 곧 치맥이요, 치맥이 곧 야구다. 야구와 치맥의 영혼은 하나다. 매년 프로야구 페넌트 레이스가 시작되는 4월이면 겨우내 여유롭던 단골 치킨집 사장님의 전화 목소리가 다급해지기 시작한다. 야구의 계절이 깊어지는 여름이 되면 그는 작년 여름처럼 속사포 화법을 구사할 것이다. “주문이 밀려서 1시간 정도 걸릴 것 같은데요.”

‘아재문화’에서 나들이문화로

2010년대 들어 야구장 공기는 확 바뀌기 시작했다. 전광판 아래쯤 숨어 고기 구워 먹는 사람들이 피워대던 자욱한 연기가 사라지고, 관중석마다 흥건하던 소주 냄새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외야 구석에서 로프를 매달아 광주리째 소주병을 잔뜩 끌어 올리던 행상도 볼 수 없게 됐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후 형성됐던 ‘아재’들의 야구 문화가 변방으로 밀려나고 야구장엔 ‘야구 아는 여자들’과 데이트문화, 회식 문화가 찾아왔다. 각 구장 테이블석은 ‘치맥석’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맛있는 야구장’으로 꼽히는 인천 SK행복드림구장(문학구장)은 외야석 중 잔디를 깔아 놓아 돗자리 위에 드러누워 야구를 관망할 수 있는 ‘그린존’, 전기 그릴에 삼겹살 등을 구워 먹을 수 있는 ‘이마트 바비큐존’ 등을 만들었고, 사직야구장은 문학구장, KIA 챔피언스 필드(광주구장),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대전구장)에 이어 올해부터 글램핑존을 운영한다. 새로 개장한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대구구장) 역시 잔디석을 마련했다. 잠실야구장을 빌려 쓰고 있는 두산 베어스와 LG 트윈스도 외야 테크석을 갖는 것이 소원이다. 2023년 새 잠실야구장이 준공 예정이지만 현 잠실야구장의 낙후된 시설에 대한 업그레이드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 구단과 야구팬의 공통된 바람이다. 다양한 형태의 관중석이 생겨나는 경향이 이어지는 가운데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은 ‘놀기 좋고 먹기 편한’ 쪽이다.

바뀐 공기와 함께 야구장 매점 음식의 구색도 치맥 일색에서 점차 다양해지는 추세다. 잠실에선 곱창, 순대볶음이나 반듯한 도시락에 포장된 삼겹살 세트, 주먹밥이 치킨의 아성마저 위협하는 인기 메뉴가 됐다. 문학구장엔 인천의 명물이라는 신포닭강정도 입점해 원정 팬들의 입맛을 홀리고 있지만 ‘3루 떡볶이’로 불리는 밀가루 떡볶이와 군만두 또한 초등학교 앞 분식집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운 맛이다.

신흥 ‘맛있는 야구장’으로 떠오른 수원KT위즈파크(수원구장)에는 수원의 맛으로 정평 난 진미통닭과 보영만두가 입점해 뉴페이스 구장으로 야구 팬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역시 뉴페이스 축에 속하는 구장인 마산종합운동장 야구장에도 이재학 선수의 별명을 딴 ‘스트롱베리 주스’가 화제가 됐다. 광주구장에선 야구 공 모양의 ‘타이거즈 볼’ 호두과자가 명물로 꼽히고, 대전구장에선 ‘야신’ 김성근 감독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야신(야채가 신선한) 고로케가 화제를 끌었다. 여름철에는 열무국수나 메밀국수도 경기 열기를 식히는 메뉴로 인기다. 대구구장은 기존 삼성라이온즈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앞 명물이었던 납작만두를 구장 매점에 모셔왔다.

치맥은 소주와 오징어를 축출하고 야구장 미식의 왕좌에 올랐다. 강태훈 포토그래퍼
치맥은 소주와 오징어를 축출하고 야구장 미식의 왕좌에 올랐다. 강태훈 포토그래퍼

야구장은 그러나 치킨이 가장 맛 없는 곳

평상시의 엄정한 입맛에 비해 야구장 미각은 여전히 ‘직관(직접 관람) 버프(능력치를 일시 증가시켜주는 효과 내지 기술을 이르는 게임 용어)’에 의존하고 있다. 조금만 냉정하게 바라봐도 야구장 음식은 완성도가 부족한 것 투성이다. 세간의 푸드코트나 공항, 백화점 지하 식당가의 발달상을 대 놓고 보자면 야구장은 2016년에 걸맞은 발달 단계를 뒤쳐졌어도 한참 뒤쳐졌다. 야구계에서는 새로운 관객층 확충에 대한 성토가 끊이지 않지만, 그 방책으로 음식을 내세우자면 근본적이고도 모순적인 허점이 있다.

먼저 물리적인 한계. 야구장은 여전히 도시인의 유원지이기보다는 야구팬의 응원장이다. 내야, 외야 일반석은 여전히 좁고 불편하다. 옴짝달싹하기 힘들 정도로 좁은 자리에서 무릎 위에 음식을 올려 놓고 먹는 것부터가 맛을 떨어트리는 요인이다. 게다가 응원은 따라 하지 않는다 쳐도 누가 홈런이라도 치면 벌떡 일어나 환호해야 하고 상대 투수가 애먼 견제구를 자꾸 던지기라도 할 때면 맹렬하게 야유도 해야 한다. 페넌트 레이스가 흐르며 야구 열기가 피크에 닿고 한국시리즈로 이어지는 동안엔 그 좁아터진 관중석조차 모두 매진되기 일쑤이니 넓고 쾌적한 좌석을 더 만들라 요구하는 것도 모순이 된다.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 아무튼 야구를 보자고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근본적인 한계는 야구장이 공공 체육시설이라는 데서부터 나온다. 바비큐존을 운영하는 구장들이 몇 곳 있지만 상상처럼 숯불구이는커녕 휴대용 가스버너도 고사하고 전기 그릴을 대여해주거나 가져오도록 하고 있다. 공공 체육시설인 야구장은 안전을 위해 가스 등 화기를 사용할 수 없게 돼있다. 사용할 수 있는 건 전기를 사용하는 조리도구까지다. 안 그래도 좁게 설계된 매점 주방에서 할 수 있는 조리는 한계가 명확하다.

이율배반적이지만 모두가 그토록 열광하는 야구장 치킨은 운이 어지간히 좋지 않고서야 맛있기가 힘들다. 한 구장의 치킨은 1회 초에 구매했는데 벌써 다 식어 있었다. 눅눅하게 물기를 머금은 그 치킨에서는 역한 기름 쩐내와 비릿한 맛이 훅 끼쳐왔다. 튀김은 강한 화력이 필요한 조리법이다. 더욱이 야구 경기장 규모를 먹일 정도로 대량으로 조리해야 한다면 더더욱 큰 화력과 큰 솥이 여럿 필요하다. 그 일을 하자면 야구장 바깥에서 튀겨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튀겨온 치킨을 깔아 놓고 파니 맛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악의적인 업주가 일부러 그런 상태의 치킨을 파는 게 아니다. 좀 더 나은 맛을 추구하자면 데우는 정도로 다시 튀겨 팔 수는 있겠지만 야구장에서 치킨이 팔려나가는 속도와 양을 놓고 본다면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장에서 먹는 치킨은 맛있다’고 기억된다. 그것이 바로 앞서 얘기한 직관 버프의 힘이다.

뭉근한 불에 데워 파는 음식이 적합

약한 불에 뭉근하게 익히거나, 데우면 맛이 복구되는 음식은 반면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다. 전기 조리기구의 시원찮은 화력이나마 오래 끓인 떡볶이, 한 번 볶아 뒀다가 다시 데워서 그 자리에서 내놓는 볶음류, 바비큐 방식으로 대량으로 익혀뒀다가 겉을 지지며 데우는 고기구이류라면 각 요리에 맞는 온도를 지닌 따뜻한 상태로 즐길 수 있다. 아예 온도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한 닭강정, 김밥, 팝콘 등 스낵이 어쩌면 야구장에 가장 적합한 음식이다. 앞서의 치킨뿐 아니라 분식집의 각종 튀김, 감자튀김이나 츄러스 같은 튀긴 음식은 구매할 때 가급적 뜨거운 것을 고르는 요령이 필요하다.

치킨의 짝꿍, 맥주 또한 작년 ‘KBO SAFE 캠페인’ 실시 이후 최상의 맛을 기대하기는 힘들게 됐다. KBO에서 지정한 관중석 반입 가능 알코올도수 5도 이하의 주류는 사실상 맥주가 유일하다. 그마저도 캔, 유리 용기, 1리터 이상은 반입이 안 되어 관중석 밖에서 제공되는 플라스틱, 종이 소재의 1회용 컵에 부어 들어가야 한다. 캔이 맥주를 마시기 위한 최상의 식기는 아닐지라도, 단언컨대 플라스틱 컵이나 종이컵보다는 마시는 느낌이 월등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생맥주 이동판매원, 일명 ‘맥주보이’ ‘맥돌이’라 부르는 청년의 존재다. 잠실구장, 대전구장, 사직구장 등에서 권총으로 거품 몽글몽글한 생맥주를 쏴주는 호쾌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응원팀의 타자가 홈런까지 쏴주면, 이곳은 미쉐린 3스타가 부럽지 않은 지상 최고의 미식낙원이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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