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헬조선’이라면 미국도 ‘헬미국’이고 일본도 ‘헬일본’입니다. 양극화 문제는 여러 선진국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정치이기 때문에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로버트 파우저(55)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애정을 담아 펴낸 책 ‘미래시민의 조건’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1982년 첫 인연을 맺은 뒤 30여년간 한국을 지켜 본 그는 한국어로 쓴 이 책에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을 민주주의의 문제로 인식하며 한국의 미래를 짊어진 청년들에게 책임 있는 시민의식과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책의 부제도 ‘한국인이 알아야 할 민주주의 사용법’이다.
고향 미국 미시간주 앤아버에 있는 미시간대에서 일어일문학을 전공한 파우저 전 교수는 일본을 오가며 한국에서만 14년간 살았다. 서울에서 살 때는 서촌의 작은 한옥을 수선해서 지내며 역사적 경관 보존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힘을 쓰기도 했다. 카이스트와 고려대 강사를 거쳐 2008년 서울대 교수로 임명됐으나 “글로벌 시대에 맞춘 장식물”이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마음 고생을 했다. 결국 2014년 “65세까지 소외된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 재임용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서울대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며 “한국 조직에는 성공에 유리한 스펙과 조건을 갖춘 핵심 그룹이 있는데 외국인은 직접 사업을 하지 않는 한 그 안으로 들어가기 어렵다”고 한국 사회의 폐쇄성을 지적했다.
파우저 전 교수는 근황을 묻자 “멋있게 말하면 독립학자이자 작가, 솔직히 말하면 백수”라고 유창한 한국어로 답하며 크게 웃었다. 오랜만에 고향에서 지내며 그는 한국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미국에선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는 선거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정치 활동을 하면서 시민의 권리에 대해, 한국의 시민의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한국은 구조적으로 시민의식을 수용할 수 있는 제도가 약한 것이 사실이지만 시민들이 공동체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요구하고 사회에 필요한 변화를 직접 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파우저 전 교수는 “우연찮게 총선 시기에 한국에 돌아왔는데 예상보다 시끌시끌하지 않고 크게 화제가 되지도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왔기에 청년 세대에 대한 근심도 크다. “1987년의 청년과 2016년의 청년은 근본적으로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요즘 청년들은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더 크기 때문에 스펙 쌓기에 바쁘죠. 양극화 사회에서 낙오하는 건 정말 무서우니까요. 하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그는 ‘미래시민의 조건’을 쓰며 계몽주의적 관점을 피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을 아끼고 한국에 관심이 많은 개인으로서 수평적으로 생각하려 했다는 것이다. “건설적인 의견을 제시하기보다 한국 독자에게 자극을 주는 의견 중심으로 쓰인 ‘외국인이 본 한국’ 관련 책과 거리를 두고 싶었습니다. 서울은 앤아버처럼 제게 고향 같은 곳입니다. 이 책을 통해 한국의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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