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손으로 담백하고 깊이 있게 끓여낸 뚝배기
제주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인이 전화를 걸어 ‘제주에 놀러 가는데 어느 집이 맛있냐’ 고 물어왔다. 이삿짐을 부리고 정리를 대충 마친 뒤, 맛있는 무언가를 먹어보자는 마음으로 인터넷 검색을 했던 게 한 달이 채 안되었던 때였다.?지인의 전화가 인상 깊게 기억되는 건, 우리도 맛집을 잘 모르는데 제주에 산다는 이유로 그런걸 알고 있어야 하나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 전화가 앞으로 받게 될 같은 질문의 수많은 전화나 메일의 시작이었기 때문이었다.?몇 번의 같은 질문을 받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다.?이럴 바엔 차라리 우리가 맛집을 찾아 다녀보자!? 내 블로그의 맛집리스트는 이런 계기로 시작되었다.?
제주의 음식은 경이로움과 낯섦 사이의 어디쯤이었다. 입도 첫 날 마주했던 순대의 압도적인 존재감, 고기국수라는 이름부터 살짝 부담스러운 생경함, 그리고 어랭이 객주리 몸 등의 생소한 사투리 명칭까지… 제주의 음식은 육지의 익숙했던 것들과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입도 후 지금까지 6년 동안 생소함은 익숙함으로 변하였고, 익숙함이 일상과 섞이며 아무렇지 않아지니 알게 된 맛집도 많아졌다. 이제는 ‘어디가 맛있냐’라는 질문에 어렵지 않게 나름의 추천 맛집을 소개해 줄 정도가 되었고, 나 역시 무언가 먹고 싶어지면 알아서 찾아가는 집들이 생겼다.
아침비행기로 제주에 와 여행을 시작하는 지인들에겐 거의 이 해장국집을 소개한다.?시청앞 백성원해장국은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깔끔하고 깊은 육수와 푸짐하고 균형 있는 내용물로 시각과 첫 맛을 사로잡는다. 만족감으로 시작한 첫 맛은 뚝배기의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힘을 잃지 않는다. 뒷맛 역시 개운해서 텁텁한 잔상을 남기지 않는다.
해장국집 많기로 유명한 제주의 유서 깊은 해장국집들 사이에서 이제 막 자리한 이 집이 유명세를 탄 데엔 이유가 있었다. 해장국도 만족스럽지만, 이 집의 압권은 내장탕에 있다. 곱창을 비롯한 풍부한 내장고기의 양은 기본육수의 깊이와 함께 극도의 만족을 끌어올린다. 여기에 약간의 투박함과 구수함이 더해져서, 내장탕은 완벽에 가까운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 집 내장탕을 추천 받고 맛을 본 친구는 맛이 어땠냐는 내 문자질문에 ‘엄지 척!’이 눈앞에서 그려지는 찬사 가득한 문자를 보냈었다.
메뉴를 직접 주문 받고 끓이는 주인장은 사실 미대출신이다. 그림을 그리다 해장국집을 연 그는 붓과 팔레트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영업이 끝난 후의 시간엔 차분하게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이 집의 벽면엔 제주의 자연을 그린 그림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붓터치가 특징인 아련한 그림 속에는 한라산이 물들어 있고 용눈이오름과 다랑쉬오름이 차분하게 시선을 채운다. 제주의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표현하는 손, 그리고 그 손으로 담백하고 깊이 있게 끓여내는 뚝배기에는 열망을 다스려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흐르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이것은 단골이자 개인적인 나름의 교류가 있었으니 느껴지는 모습일 것이다.
제주에서 이주민으로 산다는 것은, 새로움과 호기심의 바다에서 인식의 감각이 예민해지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먼저 정착한 주민보다도 더 많은 맛집과 여행지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 제주는 일상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이곳 역시 사람 사는 동네이기에,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감각의 예민함은 여행자들이나 나보다 늦게 입도한 사람들의 몫으로 넘겨진다. 일상으로 수렴되어 무디어진 감각의 장점은, 여행지로서 한껏 흥분된 제주의 모습을 조금은 덤덤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난 그런 시선으로 제주를 보고자 한다. 그것이 맛집이든 카페이든 아름다운 장소이든 간에, 차분하고 나지막하게 그려보고 싶다. 이 글이 그렇게 시작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전영웅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