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의 성과를 정리해 보여주겠다는 건 사실 이제 관에 들어가겠다는 표현이죠.”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는 최근 개막한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전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5월 29일까지 서울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지난 10년간 서울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이하 소규모 스튜디오)의 성과를 정리하는 자리다. 일종의 회고전 성격을 띤 이번 전시는 지금까지 쌓아 온 성과를 털어 버리고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겠다는 일종의 다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목에 담은 것처럼 이 전시가 10년 동안 서울에서 나고 자란 모든 그래픽 디자인을 다룬 건 아니다. 전시는 오로지 ‘소규모 스튜디오들이 디자인계에서 어떻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왔는지’에 주목해 12팀의 다양한 작업을 전시한다.
지난 10년 동안 도시 ‘서울’은 디자인을 정책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서울의 색이 지정되고 택시 색이 바뀌었다. 정부뿐 아니라 대기업이 주도하는 그래픽 디자인 물도 거리마다 넘쳐났다. 이러한 강제된 디자인의 홍수 속에서 소규모 스튜디오들은 자신의 세를 조금씩 확장했다.
소규모 스튜디오들은 전시회 홍보물이나 인문도서 같은 저예산 작업들을 거의 유일한 활동으로 삼으며 정부와 대기업 위주로 흘러가는 디자인계의 빈틈을 메웠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빈 소규모 스튜디오들은 메이저 디자인계와 문화예술계에 오히려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됐다.
전시를 기획한 김형진, 최성민은 10년 동안 발표된 소규모 스튜디오의 디자인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을 ‘101개 지표’로 정리했다. 순위는 없다. 그리고 전시에 참여하는 12팀은 자신이 했던 작품을 전시에 걸지 않았다. 101개 지표를 참조해 다시 디자인을 해 전시에 걸었다. 말하자면 “디자인에 대한 디자인”을 한 셈이다.
과거의 디자인에서 추출한 101개 지표 중에는 가운데 맞추기, 단색, 반복 등이 있다. 전시에 참여한 ‘길종상가’라는 팀은 이 단어들을 모티프로 삼아 101개의 조형물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디자인의 디자인인 셈이다. ‘더 북 소사이어티’는 한 번 보고 버려지는 일이 많은 홍보 인쇄물들을 한 데 모아 서재로 만들었다. 일회용 홍보물에 불과했던 종이들은 작가의 재작업으로 ‘불완전한 리스트’라는 작품으로 탄생한다.
그냥 지금까지 성과물을 전시장에 죽 걸어 보여주면 훨씬 쉬웠을 것을, 굳이 이렇게 꼬아 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함영준 큐레이터는 “소규모 스튜디오들이 구축한 디자인을 다시 디자인한다는 건 일종의 자축”이라며 흐뭇해하면서도 이내 “지난 10년을 정리해 보여준다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라고 강조했다.
‘마이너’로 시작해 이제 ‘메이저’가 됐지만 작가들은 여전히 소규모 스튜디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이번 전시는 소규모 스튜디오들의 장례식이다”라는 표현은 곧 그래픽 디자인의 세계에서 어느덧 기성세대가 돼버린 1세대 작가들의 미래를 향한 다짐인 셈이다.
신은별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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