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4월 6일
후투(Hutu)와 투치(Tutsi). 이름도 흡사한 르완다의 두 부족간 전쟁… 이라기보다는 학살로, 90~94년 5년 동안 매년 평균 30만 명이 숨졌고 그 두 배의 난민이 생겨났다. 인종 청소라는 말은 보스니아 내전(92~95년)에서 처음 쓰였지만, 르완다 상황도 덜하지 않았다. 여성 아이 가리지 않았고, ‘인정’있는 자들은 총 못 들게 손목만 잘랐다. 광기가 절정이던 1994년 4월 한 달, 집권 후투 정부군과 민병대가 학살한 투치만 25만 명. 대통령 하비아리마나(Habyarimana)의 비행기 테러 사망(4월 6일) 직후였다.
갈등 원인은 혈통ㆍ문화보다 계급적 격차였다. 그들은 기원전부터 서기 16세기에 걸쳐 르완다에 정착해 내내 같은 언어를 썼다. 투치는 주로 가축을 쳤고, 후투는 농사를 지었지만, 그 사이 피도 섞고 주업을 넘나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던 게 점차 가축이 많은 투치는 부자의 통칭이 됐고, 18세기 이후 권력까지 쥐면서 상류층이 됐다.
분리ㆍ차별을 심화한 건 백인들이었다. 1차 대전 중 르완다를 차지한 벨기에는 교육ㆍ복지 등 기회와 혜택을 투치에게 집중, 그들을 통해 후투를 착취ㆍ통치했다. 1935년 부족카드까지 도입했다. 사실상 계급 신분증, 분리ㆍ차별의 장벽. 전체 인구의 80~90%가 당연히 후투였다.
2차 대전 이후 아프리카 독립 열기와 함께 후투족 각성과 조직화도 본격화했다. 1959년 후투 한 부족장이 살해되면서 대규모 무장 저항(르완다 혁명)이 시작됐다. 그 결과 후투족이 권력을 잡았고, 62년 독립했다. 그리고 이어진 후투의 투치에 대한 보복 학살. 인근 콩고민주공화국과 우간다 등지로의 도피ㆍ망명.
내전은 1990년 본격화했다. 이웃 우간다에 거점을 둔 투치 반군 르완다애국전선(RPF)의 게릴라전. 반복되는 학살과 보복 학살 끝에 93년 8월 유엔 등의 중재로 내전종식ㆍ과도연립정부 구성을 골자로 한 ‘아루샤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하비아리마나가 숨진 게 그 직후였다.
정부군과 RPF의 내전은 그 해 7월 23일 RTF의 승리로 끝났고, 망명한 후투 집권자들은 국경 너머 콩고 동부에 거점을 두고 내전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월 5일자 ‘가만한 당신- 카추바’가 살던 곳이 거기였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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