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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혀와 입술

입력
2016.04.0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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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처럼 자발없는 것이 있을까. 입술을 담벼락 삼아서 온갖 요령을 다 피운다. 딱히 증거를 대라면 머뭇거릴 수밖에 없으나 분명히 혀는 교활하다. 자고이래 말에 관한 여러 경구들이 많은 것도 그런 까닭일 터. 사실 분란은 행위보다는 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다반사. 바늘처럼 찔러 상처를 내고 칼처럼 상대를 베며 도끼처럼 자비 없이 내리친다. 뿐이랴. 입 속에 웅크려 숨기까지 한다. 하니 요놈 다스리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입술도 만만치 않다. 그런 혀를 가두고 사는 조련사인 탓일까. 단순하게 다물고 여는 것 같지만 망설임과 단호함, 냉소, 감탄과 경악, 결단 등 감정선을 따라 섬세하게 변한다. 자유롭게 마음이 담긴 말을 할 때의 입술은 모음을 따라 정확하게 입 모양이 완성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게 열리고 닫힌다. 닫지 말아야 할 때 닫히고 열지 말아야 할 때 입술은 여지없이 새거나 일그러진다.

이쯤 되면 혀와 입술의 노릇은 인간의 본성이 진실한가 아닌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쯤 되지 않을까. 인간이 반드시 탈진시켜서 기운을 빼어놓은 다음에 써야 하는 희한한 신체의 일부. 미상불 그렇다. 단아한 입매에서 흘러나오는 격조 있고 분명하며 애타게 하고 싶은 말! 상상만 해도 듣고 싶다.

그래서 늘 함께하는 배우들에게 이것들을 잘 풀어서 최적의 컨디션 상태로 무대에 올라가야 된다고 말한다. 최적의 컨디션은 어떤 상태일까. 지칠 대로 지쳐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혀와 입술이 활개를 쳐서 캐릭터가 조작되는 경우가 많다. 오랜 기간 무대 위의 배우들을 관찰하면서 깨달은 나름의 지론이자 성과다.

하여 배우들은 혀와 입술을 지치도록 자주 푼다. 혀와 입술이 지치고 나면 확연히 소리가 달라지고 호소력도 좋아진다. 당당해진다. 말 그대로 피곤하지 않은가. 그러니 필요한 말만을 하게 되고 무엇을 꾸미기도 귀찮아지니 자연 그렇게 된다. 해보시라. 비로소 머리의 논리나 가슴의 감정이 아니라 배에서 표현하고 싶은 본성을 따라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다. 말을 만들어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말만 하게 된다.

물론.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할 타이밍이라 할 때도 많고 작가가 써준 대본대로 대사를 쳐야 할 때도 있다. 내면에서 우러나와 하는 말이 아닐 때도 적지 않다. 그런 상황이면 여지없이 혀와 입술이 헤맨다. 더도 덜도 아니게 제 자리를 찾아 딱 있어야 하는데 더듬거리고 요령을 피우며 그 순간을 모면하려 치장한다. 수사가 늘어나고 억양이나 톤, 볼륨, 음색 등이 요란해진다. 그래서 연필을 물어 입술을 못 움직이게 하는 연습마저 하기도 한다. 혀와 입술이 이완되고 나면 비로소 내면으로의 집중이 시작된다. 내가 애타게 하고 싶은 말이 보이고 들린다. 그것을 그대로 읽어 소리를 내면 군살이 빠진 말이 그제야 완성이다.

어느새 선거철. 후보자들의 혀와 입술이 더 바빠졌다. 온갖 말들이 뿜어져 나와 누구를 찍어도 금세 유토피아가 될 성 부르다. 각자들 하고 싶은 말이 오죽 많으시랴. 더욱이 자신은 옳고 남들은 다 틀린 바에야. 그런데 썩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투표권을 가졌으나 이제 옳고 그르다에 싫증이 난 축이라서 뭐가 맞고 틀린지도 잘 모르겠고 따져 묻는데도 재미가 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바란다면. 속의 마음과 그 주석을 다는 혀와 입술을 일치만 시켜 주시라. 틀려도 좋다. 잘 하지 못해도 된다. 나중에 말만 바꾸지 마시라. 혀와 입술로 만들어내는 수사의 향연만은 정말이지 사양이다.

소리는 정신, 영혼, 육체가 삼위일체로 만들어낸다고 쓴 화술 책을 본 적이 있다. 멋지고도 값나가는 말씀. 후보자들의 혀와 입술에 정신, 영혼, 육체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면 오죽 좋을까. 이 나라의 4년을 책임질 분들의 말씀이 봄날의 벚꽃처럼 며칠짜리는 아니옵기를.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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