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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일본에 첫 한류 퍼뜨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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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일본에 첫 한류 퍼뜨렸죠”

입력
2016.04.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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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조선통신사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신청

양국 ‘성신교린’ 결실 기대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이라는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룬 이문섭 부산문화재단 대표가 부산 동구 조선통신사 역사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산=전혜원기자 iamjhw@hankookilbo.com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이라는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룬 이문섭 부산문화재단 대표가 부산 동구 조선통신사 역사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산=전혜원기자 iamjhw@hankookilbo.com

한일 양국 성신교린(誠信交隣, 성의와 믿음으로 이웃을 사귐)의 상징인 ‘조선통신사’ 기록물이 양국 민간단체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지난 30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신청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당초 2014년 3월 공동 신청,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인 2015년 등재를 목표로 정부차원에서 추진했지만 양국 외교관계가 경색되면서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시기일수록 민간 차원의 관계는 더욱 활발해야 한다는 여론에 힘입어 2014년 이후 양국 민간단체 주도로 등재 운동이 재개됐다.

2014년 한일 외교관계 경색

정부차원의 등재 힘들어져

민간 주도 불씨 되살린 주역

이문섭 부산문화재단 대표는 자칫 수포로 돌아갈뻔한 조선통신사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의 불씨를 살린 한국추진위원회의 중심 인물이다. 그는 “짝수 해에만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을 받는 유네스코 규정에 따라 가능한 올해를 넘기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양국 민간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지 불과 1년여 만에 이를 해냈다”고 소회를 밝혔다.

우리나라는 1997년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등 2건을 시작으로, 직지심체요절, 난중일기 등 13건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있다. 이는 세계에서 네번째로 많은 수치이며, 아태지역을 통틀어 최고 기록이다. 조선통신사가 세계기록유산이 되면 한일 양국의 공동으로 등재하는 첫번째 사례가 된다.

조선통신사에 대해 “최초로 일본 내 한류가 퍼진 시기”라고 운을 뗀 이 대표는 “에도시대(1603~1867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는 단순한 외교사절을 넘어 400~500명의 호화로운 대규모 행렬로 일본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문화사절단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조선통신사 방문 기간 양국 간 전쟁이 없었으니 평화사절단 역할도 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등재 신청된 시기는 1603년부터 1867년까지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 천하를 통일한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조선에 내민 화해의 제스처에 대한 화답의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대표는 “조선 전기에도 조선통신사가 있었지만 규모가 10명 가량으로 작았고,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항의방문 성격이 짙었다”며 “반면 후기에는 파견인원이 크게 늘었다”고 소개했다. 통신사를 인솔한 관료(삼사), 글로 문화를 교류한 제술관ㆍ사자관ㆍ서기, 음악과 행렬을 담당한 악대와 장악원, 재능이 풍부한 소동(아이), 막부의 요청을 받은 의원ㆍ마상재인, 통역관, 호위 담당 군관 등 구성도 다양해져 조선의 문화를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한 것은 모두 12차례. 공교롭게도 이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을 위한 한일 양국이 개최한 학술대회 횟수와 같다. 이 대표는 “일부러 횟수를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니다”면서 “올해 1월 한일공동신청서 작성을 위해 양국이 모여서 사인했는데 최종작업을 위해 학술회의가 한차례 더 필요했다”고 말했다.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의미를 계승한 조선통신사 재현 행렬이 부산 광복로 일대를 지나가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의미를 계승한 조선통신사 재현 행렬이 부산 광복로 일대를 지나가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부산은 조선통신사의 국내 이동경로에서 마지막 관문이었다. 조선통신사는 부산에서 긴 여정의 채비를 마무리하고 6척 가량의 배에 나눠 타고 대마도를 거쳐 일본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약 2,000㎞의 대장정에 나섰다.

하지만 실제로 부산에서 조선통신사를 기억하는 움직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2001년 부산바다축제 퍼레이드의 일환으로 조선통신사 행렬이 시작돼 이듬해 한일 월드컵 문화행사 일환으로 조선통신사재현위원회가 설립된 것이 발단이 됐다. 이어 조선통신사문화사업추진위원회(2003), (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2005), 부산문화재단(2009)이 차례로 발족했고 2010년 사단법인이 부산문화재단과 합쳐지면서 조선통신사 기록유산 등재 신청의 밑그림이 완성됐다.

반면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지자체를 중심으로 조선통신사 행사가 열렸다. 우리의 공동등재 신청 제안에 일본 측이 흔쾌히 승낙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대표는 “일본은 비영리조직(NPO)인 조선통신사 연지(연꽃)연락협의회, 약칭 ‘연지연’을 중심으로 조선통신사가 거쳐간 지역의 관련단체들과 관심 있는 개인들이 모여 비교적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며 “이번에 신청된 목록(111건 333점) 가운데 우리나라가 63건에 124점, 일본이 48건에 209점으로 양국의 비율이 비슷한 것은 그만큼 일본 내 관심도 크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기록유산 신청 목록 선정과정에서 이견은 없었을까. 이 대표는 “사소한 견해 차는 있었지만 공동등재 신청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예컨대 일본 측은 대마도 번주(제후)인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초상화를 목록에 넣고 싶어했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 반대했다”고 설명했다. 소 요시토시의 초상화는 결국 기록유산 등재 목록에서 제외됐다.

이번 공동등재 신청 의미에 대해 이 대표는 “단순한 이벤트나 등재를 위한 등재가 아닌 조선통신사의 정신인 ‘성신교린’을 되새기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라며 “한일 양국, 이웃나라 간에 다툼이 있을 수 있지만 과거의 역사에서 반성하고 치유해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어 갔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많은 전문가와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내년 6~8월 사이에는 기록유산 등재가 결정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부산=정치섭 기자 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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