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총수가 검찰 출두하는 모습 하루 이틀 봅니까.”
최근 만난 한 경찰 간부는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 비리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는다는 얘기를 꺼내자 대뜸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보다 더 걱정되는 일은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전직 경찰 총수들이 비리 혐의로 검찰에 불려 다니는 일이 다반사가 되면서 경찰의 위상 추락에 대한 내부의 걱정을 적잖이 들어왔지만 그보다 더한 걱정이 있다니요? 그건 바로 20대 총선이었습니다.
경찰 내부에서는 이번 총선에 기대감이 큽니다. 14명의 경찰 출신 후보들이 출마해 이중 각종 여론조사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후보가 4, 5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국민의 일상생활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아동학대와 데이트폭력 등 최근 이슈가 된 주요 현안에 대부분 발을 걸치고 있지만, 청(廳) 단위 조직이어서 정책 입법 과정에서는 아무래도 입지가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개별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에 경찰 출신이 많이 포진한다는 것은 조직 발전을 위해서도 분명 긍정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최근 터진 허 전 청장의 비리 의혹은 이러한 기대를 우려로 바꾸고 있습니다. 허 전 청장의 비리 혐의는 검찰의 최종 수사 결과를 기다려 봐야 진실이 드러나겠지만, 경찰 내부에서는 이런 구설수에 오른 것 자체가 정치권에 몸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허 전 청장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서울 노원병 출마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정치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대 총선에서 낙마하고, 이듬해 같은 지역에서 벌어진 재보선에 다시 출마했다가 또 탈락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19대와 20대 총선 평균 법정선거비용은 1억 7,000여만원입니다. 이 비용은 선거운동에 쓴 물품 금품 등을 가리키며, 선관위에 납부하는 기탁금과 선거사무소 설치 및 유지 비용은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선거 후 득표율에 따라 선거 비용을 보전 받아도 선거 한번 치르는 데 수억원을 쓰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음 선거를 위해 지역 사무실을 운영할 경우 월 최소 1,000만원은 들어간다는 게 정치권의 정설입니다. 대단한 재력가가 아닌 이상 퇴직한 경찰 간부들이 정계에 진출하기는 쉽지 않은 게 우리 정치의 현실입니다.
19대에 이어 20대 총선에 도전장을 낸 박종준 전 경찰청 차장이 원외 시절 청와대 경호차장을 지냈고, 19대 총선에 나서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번에 도전장을 낸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이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있었는데, 이들은 아주 운이 좋은 경우에 속합니다. 낙하산 인사에 대한 사회적 비판 여론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찰 고위 간부를 지냈다고 해서 공기업 등 주요 기관에 자리를 잡기는 어지간한 실세의 후광을 업지 않은 이상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경찰 내부에서는 이번 선거를 앞두고 ‘당선될 몇 명보다 낙선할 더 많은 경찰 출신 후보들이 또 다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까’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고비용의 정치구조 속에서 ‘제2의 허준영’ 사례가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경찰 간부는 “정치를 하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경찰로서 최소한 자존심과 명예는 지켜줬으면 하는데…”라며 푸념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김성환기자 bluebird@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