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들이 직장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난관은 호칭입니다.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이름 외에 언니 오빠 형 누나 혹은 선배가 대부분이던 세계에서 살다가 누군가가 나를 ‘-씨’라고 부를 때, 그 기분은 낯설기 그지 없습니다. 남을 부르기는 더 어렵습니다. 이름 외우기도 벅찬데 과장, 차장, 팀장, 본부장 등 직장 내 직위나 직책도 여러 가지라 제대로 부르기가 쉽지 않죠. 특히 나이나 지위에 민감한 한국사회에선 호칭 사용에 더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만약 부장으로 승진한 상사에게 입에 붙었다는 핑계로 예전처럼 ‘차장님’으로 불렀다가는 뒤통수에 꽂히는 상사의 따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잘 모르겠으면 높여 불러라’ ‘높여 부르는 건 괜찮아도 낮춰 불러선 안 된다’는 게 직장 내 호칭의 불문율입니다.
그런데 일부 기업들은 몇 년 전부터 이런 상식을 깨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은 사내에서 직원들에게 ‘회장님’ 대신 ‘CEO담당님’이라고 부르게 한다고 합니다. 회장님이라는 어감이 주는 권위주의를 탈피하겠다는 취지입니다. 다른 임원들도 마찬가지로 상무, 전무라고 부르는 대신 맡은 업무에 따라 ‘-담당 임원’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보수적이고 경직된 금융권 조직문화에선 드문 일입니다.
이런 호칭의 파격은 IT 업계에선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카카오는 사내에서 모두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른다고 합니다. 윤호영 카카오 부사장도 회사에선 그저 ‘대니얼’로 불립니다. 차장, 팀장 같은 일반 회사에서 쓰는 호칭은 ‘급’을 맞춰야 하는 대외 업무 때만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때조차도 가급적 ‘매니저’처럼 조직 내 서열이 드러나지 않는 직책을 사용한다고 하네요. 카카오 관계자는 “일단 직위로 부르는 순간 반대하는 의견을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합니다. ‘부장님 이건 아닌 거 같은데요?’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니얼 이건 아닌 거 같은데요?’라고 하기는 수월하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상대를 직위나 직책으로 부르면 본인도 모르게 조직 내 서열이 인식되고 이를 무시하기는 힘들어집니다. 비슷한 이유로 카카오와 합병하기 전 다음도 별 다른 직위나 직책 없이 이름에 ‘-님’을 붙여 불렀습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이런 사소함의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곧 출범하는 인터넷전문은행에 지원한 기존 금융권 직원들의 주요 이직 지원 동기 중 하나도 호칭으로 상징되는 IT 기업들의 수평적 조직문화에 대한 기대감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초기에는 무척 어색하고 손발이 오글거리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 일주일에서 한 달간 상대를 부르지 못해 ‘저기요’ 또는 눈짓, 손짓으로 부르는 적응 기간을 거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 이런 호칭이 단순히 ‘보여주기’에 그친다는 시선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호칭 하나 바꾼다고 위계질서가 엄격한 조직문화가 바뀔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처럼 잊을 만하면 터지는 높은 분들의 만행을 보면 더 많은 회사들이 이 같은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해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듭니다. 최근 논란을 일으킨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의 사례도 그렇습니다. 이 부회장은 본인의 운전기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던 사실이 알려져 결국 공개 사과 했습니다. 운전이 마음에 안 든다며 운전기사에게 욕설은 물론 뒤통수를 때리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부회장이 운전기사를 평소 어떻게 불렀는지 모르지만, 정황상 최소한의 호칭도 갖춰 부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입니다. 이 부회장이 운전기사를 ‘-씨’라고 불렀다면 어땠을까요. 한 때 유행했던 어느 광고 카피처럼 ‘스타일이 모든 것을 말한다’까진 아니더라도 스타일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송옥진기자 cli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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