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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이별하기 좋은 계절

입력
2016.04.0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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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에 흥분제라도 뿌려놓은 것 같다. 집밖으로 나오는 순간 발바닥이 웅웅거리는 걸 보면. 천지에 가득한 봄기운 때문이다. 목련과 개나리와 진달래, 산수유와 매화의 하얗고 노랗고 붉은 색감이 희끗희끗 번지고 있다. 무채색이던 도시가 하루가 다르게 화사해지는 중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매일 집을 나선다. 그제 오후에는 북악스카이웨이를 걸었고, 어제 아침에는 인왕산 둘레길을 걸었다. 오늘은 청와대 앞길로 해서 삼청동 지나 가회동까지 걸었다. 늘 혼자 걷던 길을 요즘은 친구와 자주 걷는다. 5년의 연애를 끝내고 다시 혼자가 된 친구다. 나이 마흔에 찾아왔던 사랑이 끝나니 이번 생의 마지막 사랑을 보낸 것 같다고 했다. 삼십 대에 지나간 이별은 단지 한 사람을 잃었을 뿐이지만, 사십 대에 끝난 사랑은 전부를 잃어버린 기분이라고도 했다. 나는 그저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발을 맞춘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보내고, 잠 못 이루는 밤을 맞는 일은 우리 생을 통틀어 몇 번이나 찾아올까.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비슷하게 남은 40대에게는 다시 찾아올 사랑이 있기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면 안쓰럽다기보다는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보다 얇다는 사람의 마음’을 믿고 뛰어들었고, 그 마음에 기대어 매 순간을 울고 웃으며 살았고, ‘영원이 바로 인생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랑으로 증명’해냈으니 말이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고 했던 어느 작가의 말을 빌린다면 지금 사랑하고, 아파하고, 이별하는 이들은 모두 무죄다. 이번 생을 뜨겁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서 고마웠다고 눈물도 없이 담담하게 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몸을 낮췄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보라색 제비꽃 한 송이가 피어있었다. 그 옆으로는 꽃망울을 한껏 부풀린 진달래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진귀한 것을 보듯 그녀는 제비꽃과 진달래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다음 주에 진달래랑 제비꽃 화전 부치자.” “그래, 다음 주면 활짝 피겠네. 막걸리 사와.” 화전에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인 후에는 그녀를 데리고 내가 사랑하는 숲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바구니에 와인 한 병과 치즈 몇 조각, 무릎 담요를 챙겨서. 보름달이 뜬 밤이라면 더 좋다. 계곡의 돌 탁자에 마주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와인 한 잔에 얼굴이 붉어지면 낮은 목소리로 두보의 ‘곡강이수’(曲江二首)를 읊어주고 싶다. ‘한 조각 꽃이 져도 봄빛이 깎이거니 바람 불어 만 조각 흩어지니 시름 어이 견디리’ 한 소절을 읊고 술 한 모금. ‘스러지는 꽃잎 내 눈을 스치는 걸 바라보노라면 상한 몸이나마 술 머금기를 마다하랴’ 한 소절을 마저 읊고 또 술 한 모금.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그녀에게 긴 돌 의자에 드러누워 보라고 청할 것이다. 그 의자에 누우면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하늘을 덮어온다. 그 아늑한 품에 안겨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를 맡고 있으면 삶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나 되묻게 되곤 했다. 아무리 아픈 일을 겪었어도, 아무리 힘든 하루를 보냈어도, 봄 숲에 누워 있으면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겨났다. 풀과 꽃과 나무가 자라고, 피어나고, 잎을 밀어 올리는 계절이기에. 생명의 기운으로 넘실거리는 봄볕 아래서는 살아있는 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젖은 상처들이 곧 마를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니 봄은 이별하기 좋은 계절이다. 그 이별은 새로운 시작에 다름 아니다. 산책을 하고, 화전을 부치고, 한 편의 시를 읽고, 밤의 숲에서 별을 보며 이 봄을 온전히 누리기. 일상을 빛나게 하는 이 사소한 것들을 잊지 않는 한, 그녀는 괜찮을 것 같다. 아무리 아픈 이별을 한다 해도 끝내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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