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난민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ㆍ이언숙 옮김
민음사 발행ㆍ296쪽ㆍ1만7,000원
민족주의, 인종주의, 성차별, 소수자 인권 문제 등 흔히 PC,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 불리는 문제에 남달리 발달된 후각을 지닌 이들에게라면, 이 책은 아주 경을 쳐야 마땅할 책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쓴 ‘희망 난민’이다.
책은 ‘반전, 반핵과 세계평화를 위해 세계를 뛰어다니는 젊은이’로 상징되는 ‘피스 보트’에 대한 참여관찰기다. ‘이 땅의 훌륭한 젊은이들이로고!’라는 감탄이 아니다. ‘희망 난민’이란 책 제목과 4장 제목 ‘자기 찾기의 유령선에 오르는 젊은이들’이란 표현이 암시하듯, 피스보트는 허깨비라 비꼬아 둔 책이다. PC라고? 자기만족적 통과의례 아닌가? 자아도취 아닌가?
압권은 5장 ‘르포, 피스보트’다.
그 전에 피스보트부터. 1983년 처음 조직됐다. 한 해 전인 1982년, 일본 문부성은 이웃 아시아국가에 대한 ‘침략’을 ‘진출’로 고쳐 쓸 수 있도록 했다.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이슈의 시발점이다. 그 때 몇몇 대학생들이 직접 전쟁 현장을 찾아보겠다고 나선 게 ‘반전평화의 배’ ‘반핵의 배’ 피스보트다.
저자는 2008년 5월 세계일주를 목표로 출항한 62회 피스보트에 참여했다. 사회학자니까 설문조사나 심층인터뷰도 진행했다. 이념과 활동에 공감하는 이들이 ‘세계형’이라면, 이념보다 또래 젊은이들의 활력 넘치는 삶 그 자체가 중요한 ‘문화축제형’, 이념엔 공감하지만 활동은 부담스러운 ‘자기찾기형’이 있다. 그냥 싼 값에 세계일주를 하고팠던 ‘관광형’도 있다. ‘관광형’은 세계평화라는 이름 아래 피스보트측이 벌이는 각종 축제형 이벤트를 “중학생 수준”이라 비웃는다.
결정적인 사건은 미국 체류 때 벌어졌다. 승선비를 낮추려 낡은 배를 쓰다 보니 항해가 원만하지 않다. 마침내 미국 항만청이 안전을 이유로 출항을 막았다. 이때 “심지 굳은 네 명의 연장자들”이 나섰다. 이들은 “피스보트에 책임을 묻고 또 물었다.” 그렇다. “이들이 바로 학생운동 세대다.”
이 연장자들은 어쨌든 돈 받고 운항하는 것이니 피스보트측이 안전, 비용, 일정 등에 대해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피스보트 탑승자답게 피스보트의 방식대로 다른 이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조사도 하려 했다. ‘하려 했다’고만 쓴 이유는 다른 젊은이들의 항의와 조사 방해 때문이다. 복사용지를 제공하지 않는 치사한 방식에서부터 문항에 대한 검열도 했다. 미국의 지역 신문들은 고장 때문에 발이 묶인 피스보트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는데, 정작 피스보트 내에서 발간되는 신문에서는 이에 대한 기사가 단 한 줄도 없었다. 있는 건 뭐? 세계평화다.
사회학자의 글이니 이론적 틀과 분석이 따라 붙는다. 출발점은 3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수장으로 꼽히는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인정(이 책은 일본식으로 ‘승인’이란 표현을 썼다) 이론이다. 종착점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적 노화’다.
이 이론적 틀로 정리한 세계평화의 배, 피스보트란 이렇다.
피스보트는 PC를 내세운 일종의 인정공동체다. PC는 정말 무서운 것이어서 그 어떤 사람에게서라도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와 성차별과 소수자 인권 등에 대한 미세한 무감각을 다 찾아낼 수 있다.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말이다. 어쩌면 감정적으로는 가장 폭넓은 인정을 주장하지만, 논리적으로 가장 손쉽게 모두를 배제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나의 순수성에 대비되는 너희들은, 이 놈도 저 놈도 하나같이 모두가 다 똑같이 틀린 놈들뿐이니. 그렇게 다 찾아낸 뒤 가 닿는 결론은 차라리 와장창 다 망해버리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표정을 살짝 바꾼다. “논리나 언어가 아닌 감각으로 이어진 관계성은 겉보기에 아무리 공고해 보여도 실은 불안정하고 유약한 관계다.” “자신의 행동이 비난 받게 되면 이것을 의례적 의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존재 그 자체를 부정당했다고 느끼고 마는 것이다.” “우익이 주장하는 ‘일장기’와 피스보트가 주장하는 ‘평화헌법 9조’는 기능적으로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자신들과 무관한 문제일 땐 간단히 비판하면서도 그 모순이 자기들을 향하였을 때는 이제까지 보여준 긍정적인 위세를 잃고 말았다.”
사회적 노화란 그 결과다. 이들의 꿈은 “너무나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한 채 있었기 때문”에 이젠 “그저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인정받으리라는 희망을 모두 단념”하게 된다. 열렬한 PC로 시작됐건만 이들의 활동은 “사회 운동이나 정치 운동과의 접촉성을 담보하기는커녕 젊은이들의 희망이나 열기를 공동성을 통해 포기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피스보트가 이럴진대, 희망을 가지려 들지 말라. 단념하라.
이쯤이면 저자의 의도가 명백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결론부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단념하라’는 말을 듣더라도 뭔가를 하려는 사람은 그 일을 하고 만다.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뿐일지라도.” 책 자체가 하나의 풍자화였던 셈이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위악적일 것까지야 있었을까. “사이비 희망이나 격려는 결국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차라리 시종일관 비관적으로 기술하며 비판적으로 철저히 부정하고, 그렇게 했는데도 남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믿고 싶다.” 희망은 저 멀리 지평선 어디엔가에서 두둥실 떠오르는 구름 같은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중얼거리는 결단이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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