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따로 암송하는 시가 없는데 이 ‘대추 한 알’은 외울 수 밖에 없는 시였어요. 어린이도서관에서 우연히 같은 제목의 그림책을 발견하고 너무 좋아서 책이 상할까 봐 좀 위쪽에 꽂아놓기도 했어요.”
30일 서울 논현동 콜라보서점 북티크에서 열린 한국출판문화상 어린이ㆍ청소년 부문 수상작 ‘대추 한 알’ 북콘서트에 참석한 여성이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저자와의 질의 응답으로 진행되는 여느 북콘서트와 달리 이날 행사는 다소 팬 미팅 같은 분위기였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로 시작하는 장석주 시인의 시 ‘대추 한 알’이 워낙 폭넓은 사랑을 받은 데다가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유리 작가의 대추 그림에 많은 이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출판문화상 심사위원인 김지은 평론가의 사회로 진행된 행사에는 유리 작가와 장석주 시인, 책을 펴낸 출판사 이야기꽃 김장성 대표가 참석했다. 장 시인은 3년 전 유리 작가와 김 대표가 자신의 시를 그림책으로 내겠다고 처음 찾아온 날을 회상했다. “비 오는 날이었을 겁니다. 같이 고등어 조림을 먹으며 출판 얘기를 했는데, 여덟 줄짜리 시로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어요. 어찌됐건 수락했고 그 후 3년 간 연락이 없었습니다.(웃음)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와 책이 완성됐다고 해서 매우 놀랐습니다.”
3년에 걸쳐 완성된 그림은 강렬했다. 한 알의 대추가 벼락과 태풍을 맞으며 달관에 이르는 모습을, 유리 작가는 극도의 사실주의적 화풍으로 풀어냈다. 시를 그림으로 바꾸는 일이 “두려웠다”고 작가는 말했다. “머리 속엔 우주가 있는데 제 앞엔 백지가 있는 거예요. 광화문 글판에서 이 시를 볼 땐 참 좋았는데 막상 그리려니 과연 내가 대추 속의 우주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압박감이 심했어요.”
김장성 대표가 말을 도왔다. “보시다시피 (유리 작가는)드로잉에서 느껴지는 힘이 아주 강한 작가입니다. 단점이 있다면 너무 집요하다는 건데 전작인 ‘돼지 이야기’를 그릴 땐 본인이 힘들어서 잠수도 몇 번인가 탔어요. 이번엔 좀 편안하게 일하자고 했는데 역시나 그렇게 안됐습니다. 최근 시 그림책들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데, 저는 좋은 그림이란 시처럼 행간에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리 작가의 대추 그림을 통해 많은 이들이 제각각 감상을 말하는 걸 보며 보람을 느낍니다.”
‘대추 한 알’의 실제 주인공인 대추의 뒷이야기도 공개됐다. 장 시인이 사업을 접고 시골로 내려가 마당에 심었던 대추는, 시가 발표된 이후 기묘하게도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한다. 김지은 평론가는 “아마도 시에 기를 다 뺏긴 모양”이라고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출판문화상 심사 당시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것은 작가의 인지도나 대중성이 아니라 작가의 탄생이었습니다. 한 작가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형성하는 과정에 이 상이 작은 격려가 되기 바랍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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