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도 하지, 겨우내 게으름에 젖어 아침잠이 늘었던 몸이 어느 날부터인가 일찍 눈이 떠진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꽤 쌀쌀한 날이건만 어둠이 가시는 여섯 시 어름이면 주섬주섬 옷을 꿰고 나가게 된다. 딱히 식전부터 해야 할 농사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거름도 진작에 냈고 과수원 전정도 끝냈으니 조금 더 게으름을 피워도 괜찮은데 말이다.
손을 비벼가며 느리게 과수원을 돈다. 과수원을 둘러싼 낮은 산속으로 몇 걸음 발길을 들여놓기도 한다. 아무리 물오르는 봄날이라도 어제와 별반 다를 리 없건만 나는 복숭아나무 가지에 매달린 몽우리들에 오래 눈을 맞춘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쇠어버린 냉이며 막 꽃을 피우는 민들레에도 시간을 내준다. 나는 전혀 영적인 인간이 아니라 식물을 보며 신비함 따위를 느낄 리는 없다. 다만 새롭게 움트는 초록 생명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사람들만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얼마나 쉽게 잊고 사는 일인가. 이 지구별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모두가 잠시 세 들어서 사는 나그네일 뿐이다.
봉긋하게 솟아오르는 사과꽃 몽우리나 마른 가지를 뚫고 막 새순을 내미는 가냘픈 낙엽송 이파리를 보고 있노라면 내 몸 속으로 차오르는 게 있다. 그것은 겨울에서 깨어난 내 몸이 꼭 필요한 에너지 같은 것인데, 나는 생물학에 대해서 아는 바 없지만 그런 메커니즘에 관한 논문이 여러 편 나와 있을 거란 생각이다. 즉, 봄에 새롭게 생명을 품고 가득 퍼지는 식물의 기운이 동물에게도 영향을 주어 생태계가 평형을 유지한다는 식의 학설이 있지 않을까 한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봄날에 받는 이 엄청난 신생의 기운이 거의 한 해를 살아가는 힘이 된다. 그러니까 산천초목에 물이 차오르면서 메마르고 황량했던 내 몸에도 물기가 퍼져 관절이 풀리고 머릿속이 헹구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안간힘으로 꽃과 순을 내미는 매일이 마치 만삭의 배를 한 젊은 어머니의 아름다움과 겹쳐지곤 한다. 그렇다. 지금 온 들녘과 산은 만화방창 벌어질 꽃과 잎을 품은 만삭이다.
아직 그 의미를 모르던 어린 날에도 늘 신기했던 장면이 있다. 고향 앞산에는 키 큰 낙엽송들이 군락을 지어 솟아있었는데, 겨우내 검게 말랐던 나무가 어느 순간 초록의 옷으로 갈아입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 그 순간은 언제나 갑자기 왔다. 마치 하룻밤 사이에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어느 날 문득 바라보면 겨울나무가 아닌 봄날의 나무로 변해 있었다. 조금씩 변해가는 게 아니라 순식간에 다른 나무로 변하는 것만 같아서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다. 결국 나는 고향을 뜰 때까지 낙엽송이 서서히 변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내 기억 속의 낙엽송은 언제나 갑자기 옷을 갈아입는 나무이고 내 스스로는 풀지 못할 작은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낙엽송의 짧고 연한 잎이 무성해지는 늦봄이면 가는 가지를 꺾어 말꼬리를 만들어 놀기도 했다. 낙엽송 가지는 마치 버드나무 호드기처럼 껍질과 잎이 빠지는데 마땅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 우리는 그 푸른 말꼬리를 매달고 한 나절을 놀곤 했다. 이제는 사라진 고향의 낙엽송들에게도 봄날의 술 한 잔을 올려야겠다.
언제나 그렇지만 새 생명들에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은 긴 겨울이 혹독해서다. 추위뿐 아니라 지난겨울은 연이어 터진 아동학대 보도로 실로 가혹하였다. 곰곰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막장으로 가고 무너져 내리는지를 신랄하게 드러내는 것들이었다. ‘잘 살아보세’에서 바야흐로 ‘막 살아보세’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잘 산다는 게 물질적 풍요만을 의미했으니 ‘막’ 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문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이 찬란한 봄날을 슬프게 하는 질문이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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