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뿔싸! 알파고의 치밀한 수읽기에 인간대표 이세돌이 패했다. 체스는 몰라도 바둑만은 문제없다며 호기롭던 인간대표. 그의 패배에 전 국민이 경악했다. 긴장감 가득한 세간의 반응 속에는 공포심마저 스멀거린다. 인공지능이 주식투자도 하고 스포츠기사도 쓴단 얘기를 들은 지는 이미 꽤 됐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문학상 심사를 통과하기도 했단다. 인간만의 영역이라던 창조적인 일자리까지 기계들에게 내 줄 판이라는 데야, 근거 없는 공포만은 아닐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 문제로 떠오른 것,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토지 노동 자본 기술 등으로 이루어진 생산함수의 구성을 보면, 노동 없이 자본과 기술만 가지고도 성장은 가능해 보인다. 칼 마르크스의 저주를 조롱하듯 ‘이제는 노동을 착취할 필요조차 없다’는 건데, ‘자본에 의한 자본만의 성장시대’가 다가오는 와중이다. 제러미 리프킨이 예견했던 ‘노동의 종말’을 넘어 ‘잉여인간’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단 공포가 유령처럼 배회 중이다.
‘러다이트 운동’으로 기억되는 산업혁명기의 일자리 공포. 기계에 일자리를 뺏길까 봐 기계를 때려 부숴야 했던 그 공포는 교육과 훈련으로 극복이 가능했던 공포요, 저숙련 육체노동자들의 어리석음이라 치부해도 됐었던 그들만의 공포였다. 앞으로는 변호사 회계사 의사와 같은 전문직들도 희생양이 될 거라고 하는데, 교육혁명만으로는 해결이 난망한 새로운 종류의 전방위적 공포다.
자기 신념만 고집하는 종교 간의 전쟁과 테러, 인민들이야 굶어도 좋다는 김정은의 핵전쟁 놀음, 정치권의 공천 칼춤과 패싸움. 힘을 가진 소수의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며 사는 지금, 들려오는 뉴스들을 보면 인간성에 관한 잔혹한 부분만 두드러진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채팅로봇이 ‘히틀러가 옳다’고 했다는데, 극우주의자들이 인터넷으로 세뇌한 거란다. 인공지능이나 로봇을 선(善)한 인간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 급선무인 까닭이다. ‘닥치고 규제완화’의 무지몽매를 벗어 던지고 기술진보에 관한 ‘착한 통제 방안’을 준비해야 할 이유다. 과학기술이 중립적이란 착각을 떨쳐버리고 ‘착한 과학기술’을 기획할 때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자본주의적 생산을 담당할 가까운 미래, 인간을 잉여화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중심으로 한 기술발전을 이룰 것인가.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안 없이 대체토록 방치한다면 불평등의 심화와 드라마틱한 양극화는 불 보듯이 뻔한 일이다.
이에 관한 복지 분야의 대응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본소득, 예컨대 모든 사람들에게 100만원씩 주자는 주장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일자리를 늘리잔 주장이다. 기본소득과 같은 현금복지는 일을 못해도 먹고 살게는 해야 한다는 소극적 자유의 기제인 한편 노동동기침해의 기제에 머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간 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복지는 새로운 일자리창출이 가능한 적극적인 자유의 기제다.
복지기술에 관한 국제적인 동향을 보면, 치매노인 돌봄 로봇 등 사회서비스 노동력을 대체할 기술도 속속 개발 중이다. 하지만 모든 나라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나라는 노동 대체형(型) 로봇개발로 인건비 줄일 생각에만 골몰하는 한편, 어떤 나라들은 복지노동자들의 불필요한 육체노동을 경감시킬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힘을 쏟는다. 시장지향의 국가전략과 복지지향 국가전략의 차이가 과학기술에서도 드러나는 사례다.
마감된 4ㆍ13 총선 비례대표 후보자 리스트를 보면 당선 안정권에 복지전문가가 안 보이는 한편, 과학기술 분야의 ‘벼락출세’가 돋보인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파생한 인공지능의 이슈화 덕분일 텐데, 고용 없는 성장이나 잉여인간의 문제해결은 나 몰라라 기술추격에만 ‘다걸기’하자는 정치권의 성장주의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하도 비합리적이라서 인공지능도 못 쫓아낼 직업군(群)이 점쟁이란 농담이 있다는데, 점쟁이보다 길게 갈 직업으로 정치인을 꼽게 될 판이다.
안상훈 서울대 교수ㆍ사회정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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