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생활 못해 성년후견 절실한데
구청, 규정 없다며 1년여 방치
검찰이 대신 청구.. 6개월 만에 결실
20억원대 자산가지만 홀로 중증 치매를 앓아온 80대 할머니에게 성년후견인이 선임됐다. 후견 청구 권한이 있는 관할 구청이 그의 비참한 처지를 1년여간 외면해온 사실이 한국일보 보도(2015년 10월 14일자 29면)로 알려지면서 검찰이 대신 가정법원에 후견심판을 청구한 지 6개월 만이다.
서울가정법원 가사21단독 정용신 판사는 중증치매와 환각ㆍ망상 등 정신질환을 앓는 전모(87)씨에 대한 서울중앙지검의 한정후견 개시심판 청구를 받아들였다고 29일 밝혔다. 정 판사는 “사건 본인(전 할머니)이 현재 정신적 제약으로 인해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부족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한정후견을 개시한다”고 밝혔다.
‘한정후견’은 법원이 정한 범위에 한해 선임된 성년후견인이 요양시설 입소 등 신상 결정권과 예금ㆍ증권 계좌 개설 등 재산 관련 대리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후견인에 폭넓은 대리권을 주는 ‘성년후견’보다 정신적 문제가 경미할 때 내려지는 처분으로, 2013년 7월 도입된 성년후견제 중 하나다.
정 판사는 그러면서 평소 전 할머니의 일상을 살펴온 시립용산노인종합복지관 사회복지사 허모씨를 신상보호 후견인으로 지정하고, 한국성년후견지원본부(후견지원본부)에 재산관리를 맡겼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후견 청구를 하면서 “이북 출신으로 6ㆍ25 전쟁 당시 인천에 홀로 내려온 전 할머니가 혼인도 하지 않고 지냈기 때문에 마땅한 후견인 후보를 정할 수 없다”며 가정법원에 적임자를 선임해 달라고 했었다.
이에 따라 매달 350여만원씩 병원비를 주고 대학병원 정신과 병동에 1년 넘게 입원해 있던 전 할머니는 복지사의 도움으로 거처를 옮겨 보살핌을 받게 됐다. 할머니가 보유한 현금은 거의 바닥난 상태여서 법원 판단이 절실했다. 그가 2억2,000만원을 받고 전세를 놓은 여의도 아파트 세입자는 임대차 계약 만료를 앞두고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됐다. 후견지원본부는 밀린 아파트 관리비를 내고 전 할머니 소유의 매매가 6억원 상당의 아파트 두 채와 금반지 등을 관리하고 법원의 허가를 전제로 일부 처분할 수 있게 됐다.
전 할머니의 비참한 삶은 2014년 6월 서울의 한 복지관 직원들의 가정 방문으로 드러났다. 쓰레기가 집안 곳곳에 가득 찼고, 바퀴벌레들이 그 틈을 헤집고 다녔으며, 냉장고에는 부패한 음식이 가득했다. 이런 사정에도 담당 구청은 “발달장애인에 대한 (성년후견) 처리 지침은 있지만 노인에 대해선 복지부의 지침이 없기 때문에 구청의 임의대로 하기 어렵다”고만 했다. 민법에 본인, 친족, 지방자체단체장, 검사는 성년후견개시 심판을 청구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구청이 1년 넘게 나서지 않아 전 할머니는 ‘법과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했었다.
손현성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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